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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1.11 14:33:48
  • 최종수정2026.01.11 14:33:48

황인술

인문학당 아르케 교수

사랑은 혁명이며, 혁명은 균열에서 출발한다. 균열은 더 이상 봉합할 수 없는 결핍에서 나타난다. 결핍은 단순한 없음이 아니다. 결핍은 완전히 소유할 수 없음에서 생겨나는 틈, 붙잡으려 할수록 더 분명해지는 공백이다. 틈이 무의식 표면으로 떠오를 때 인간은 애도라는 말을 배우게 된다. 애도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고백이면서, 잃어버림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겠다는 숨겨 둔 의지 표현이다. 애도와 결핍을 통과하며 사랑은 비로소 윤곽을 드러낸다.

사랑은 아나키즘과 닮아있다. 아나키즘은 무질서 상태가 아니라 강제와 권위 부재를 뜻한다. 진정한 사랑 역시 종교, 사회, 자본, 국가, 군대, 제도 같은 외부 권위에 의해 정의되거나 강요될 수 없다. 사랑은 규칙 이전에 발생하며, 명령 이전에 선택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은 공동체 규범에 순응하는 행위가 아니라 타자 앞에서 스스로 책임을 떠안는 결단이다.

중심이 무너지면 주변이 깨어난다. 명령이 사라질 때 타자 얼굴이 비로소 보인다. 사랑이 혁명이라 불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랑은 타자를 제도나 규칙 안에 가두지 않는다. 사랑은 타자에 대한 자유를 인정한 이후에도 관계를 유지하려는 시도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지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현실을 바꾸겠다는 욕망을 내려놓고, 그 사람이 지닌 고유한 슬픔과 기쁨 전체를 받아들이겠다는 적극적인 태도다.

이 지점에서 크레온과 안티고네가 생각난다. 크레온은 법을 통해 공동체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법은 매장할 권리를 빼앗고, 살아 있는 자에게 애도를 금지했다. 크레온은 공동체를 지키려 했지만, 사실은 결핍을 두려워했다. 잃어버림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크레온은 죽음을 통제하려 들었고, 결국엔 삶을 잃고 말았다.

반면 안티고네는 결핍을 인정했다. 그녀는 오빠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애도는 사랑에 대한 마지막 형식, 사랑이 끝났음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끝나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안티고네는 법보다 결핍이라는 진실을 택했다. 이 점에서 그녀는 아나키스트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안티고네는 권력과 질서보다 사랑에 대한 윤리를 선택, 현실에 균열을 만들었다. 균열이 비극을 낳았지만, 비극 속에서 인간성은 가장 선명해졌다.

크레온은 질서가 사랑보다 위에 있다고 믿었고, 안티고네는 사랑이 법보다 먼저 태어난 윤리라고 믿었다. 결핍을 숨기지 않고 받아들이는 혁명, 타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슬픔과 기쁨을 억압하지 않는 혁명, 함께 하지만 소유하지 않는 혁명. 사랑은 거창한 구호를 내걸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말할 뿐이다.

사랑은 혁명이라는 말은 기존 질서를 전복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사랑은 오히려 질서가 숨겨 왔던 결핍을 드러내는 힘이다. 사랑은 세상 구조를 파괴하지 않는다. 대신 구조 아래 묻혀 있던 상실, 슬픔, 불안을 가시화한다. 그리고 그 결핍을 감당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변화시킨다. 사랑은 대상 소유가 아니라 선택이다.

선택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그러나 이 위험을 감수할 때 관계는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삶은 의미를 획득한다. 사랑은 조용히 말한다. "나는 너를 바꾸지 않겠다." "나는 너를 간섭하지 않겠다." "나는 네 결핍을 내 결핍과 함께 견디겠다." 이 말은 무책임한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무거운 책임 선언이다. 타자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결핍을 숨기지 않고 함께 견디는 혁명, 타자 슬픔과 기쁨을 억압하지 않는 혁명, 함께 있으되 소유하지 않는 혁명. 이것이 사랑이라는 본질이다. 사랑은 가장 오래된 아나키즘이며,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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