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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1.06 14:03:21
  • 최종수정2026.01.06 14:03:21

박영순

'파란만장한 커피사' 저자

아침 커피 잔 위로 피어 오르던 하얀 김이, 돌연 깊은 탄식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1월 5일, 우리 시대의 가장 그윽한 향기였던 안성기 선생이 영면에 들었다는 비보(悲報)를 접한 순간이다. 충무로 사무실에서 바둑과 커피로 소일하신다는 근황을 전해 듣고, 남천우 배우와 함께 정성껏 볶은 원두를 전해 올렸던 것이 불과 지난 초여름이었다. 그 맑은 산미를 즐기시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한데, 향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들려온 이별 소식이 참으로 야속하다.

고인은 '한국 커피 현대사의 텍스트' 그 자체였다. 38년간이나 한 브랜드의 모델로 활동했으니, 당신이 커피의 페르소나였다. 1983년 산업화의 굉음 속에서 일상의 정서가 거칠게 마모되던 시기, 첫 커피 광고에 소개된 카피가 "몽글몽글 잘 녹는 커피처럼 다정한 우리"였다. 브라운관 속의 선생은 소비를 강요하지 않았다. 나지막한 대사들은 곧 '당신은 지금 누구와 소통하고 있는가'를 성찰하게 하는 울림이었다. 1980년대 고인의 다양한 멘트들은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치환되어 되돌아왔다. 커피는 더 이상 혼자 들이켜는 각성제가 아니라 사람 사이에 교감을 이끌어내는 오브제임을 환기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며 우리 사회는 물질적 풍요와 함께 감각의 세분화를 경험했다. 돌아보면, 커피의 언어가 '기능과 관계'에서 '감각과 인식'으로 이동한 변곡점이었다. 그러한 미학적 전환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문장 역시 고인에게서 나왔다. 양손에 원두를 가득 담아내고 "커피, 이제는 향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커피 문화는 도약했다. 혀끝의 맛을 넘어 공간을 점유하는 향을 논한다는 것은, 커피를 생리적 도구가 아니라 미적 향유의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향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멈춰야 한다. 향이 기억을 소환하면 물리적 공간은 자유로워지고, 찰나는 영원으로 늘어난다. 커피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취하게 되는 '침묵의 응시', 그 고요한 루틴은 아마 고인이 가르쳐준 미학적 태도였을 것이다.

2000년대에 이르러, 커피 서사는 보다 내밀한 삶의 안쪽으로 파고든다. 그 정점에 놓인 화두가 바로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일 것이다. 발표 당시 숱한 사회적 해석을 낳았던 이 문장은, 커피인문학의 맥락에서 볼 때 더없이 명징하다. 여기서 '여자'가 찰나의 설렘이나 자극을 상징한다면, '아내'는 긴 시간을 견뎌낸 신뢰와 사랑을 의미한다. 고인은 커피가 더 이상 유혹이나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 깊숙이 뿌리내린 동반자임을 역설했다. 희로애락을 함께 통과한 존재에 대한 은유. 이 시점에서 우리의 커피 문화는 '취향'을 넘어 '반려(伴侶)'라는 정서적 층위로 올라섰다.

2008년 "커피는 감각의 끝에서 자란다. 가슴으로 느껴보세요"라는 문장은 커피를 상품에서 경험으로, 다시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눈부신 표현이었다. 이어 2015년 '커피와 함께하는 여행' 편에서 고인은 커피를 '휴식'이자 '힐링'으로 정의했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일갈한 '시적인 거주(Poetic Dwelling)'처럼, 바쁜 일상 속에서도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순간만큼은 인간답게 존재할 수 있음을, 그는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로 웅변했다.

'안성기의 커피 광고사'는 기능주의에서 감성주의로, 다시 개인의 실존적 성찰로 이행해 온 한국 커피인문학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선생의 육체적 시간은 멈추었다. 그러나 부재가 곧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생이 남긴 수많은 말과 표정들은 이미 커피 애호가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커피의 원형(Archetype)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격의 향기는 휘발되지 않고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문다. 커피 잔이 비워지더라도 그윽한 향기가 공간을 점유하며 우리의 정서에 스미듯이, '안성기'라는 이름은 언제나 우리의 커피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시대의 향기였던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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