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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의 그림 이야기 - 21세기 마지막 선비 화가 이완호

  • 웹출고시간2025.12.31 13:49:46
  • 최종수정2026.01.08 13:44:46
클릭하면 확대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완호 作 꽃(Flower), 2006, Acrylic, Pencil on Canvas, 45.5×50cm.

ⓒ 청주시립미술관
[충북일보] 1984년 대학에 입학해서 이완호(1948~2007) 작가를 지도교수로 만났다. 2학년 때 학교에서 전설의 수업으로 회자되고 있던 교수님의 '기초 서양화' 강의를 들었다. 에스키스를 바탕으로 완성한 작품을 친구들 앞에서 보여주며 설명하는 수업이었다. 테크닉 위주로 입시학원에서 그림 공부한 우리에게는 긴장되고 두려운 시간이었다. 그 당시는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스파르타식 수업이 30년 넘게 붓을 놓지 않고 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3학년 때 한국화를 전공으로 선택하며 교수님 강의를 들을 수 없었지만,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다시 교수님 강의를 듣게 됐다. '한국근현대미술사' 수업이었다. 흐트러짐이라고는 전혀 없는 교수님 연구실에서 대학원생 서너 명이 화집을 함께 보며, 유명작가들의 작품세계와 작가의 에피소드를 듣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필자가 '그림 이야기'를 일간지에 쓰고 책을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 교수님의 영향을 받은 덕분이라 생각된다. 교수님은 결코 만만하고 호락호락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제자라고 하더라도 꾸중할 때는 눈물 쏙 빠지게 했고, 학점도 후하게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교수님을 존경하고 많이 따랐다. "너희들은 교육자가 될 것이니 실력을 키워라. 실력이 없으면 거짓으로 가르칠 것 아니냐"며 영어공부도 소홀히 하지 말고 책을 가까이 하라고 강조하셨다. 교수님의 경상도식 말투를 똑같이 따라 하는 학생들이 학년별로 있을 정도로 팬들이 많았다. 필자와 동기인 B 친구와 3년 선배인 L 형님이 흉내를 잘 냈던 것이 기억난다.

이완호 작가는 경북 성주군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에서 서양화 공부를 했다. "1967년 대학에 합격하고 거처할 방을 구하러 학교 앞을 다녔는데, 집주인이 돈 조금 더 보태 구입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볼 정도로 홍대 주변이 시골 동네였다는 얘기를 하셨다. 지금은 홍대 앞이 '핫'한 곳으로 변해 천문학적 가격으로 부동산이 매매되고 있는 상황에서 봤을 때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는 얘기였다. 교수님은 1977년 충북대에서 강의를 맡으며 청주와 인연을 맺어 후학 양성과 작품활동에 힘을 쏟았다.

1980년대 제자들과 도내 최초의 서양화가 모임인 무심회화회와 충북판화가협회 등을 창립해 척박한 지역 미술문화 발전에 공헌한 청주미술계의 큰 어른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소박하고 순수하며 욕심이 없는 것이 자연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글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지는 조선시대 문인화 같은 시적 세계를 추구했다. 독창적인 회화 양식을 구축해 '서한체(書翰體, letters-style)' 또는 '캘리그램(calligram)'이라 불린다. 서양화 재료로 그렸지만 문인화를 보는 듯 하다.

그의 이러한 작품 스타일은 그가 대학원 시절 박물관 조교로 일하며 한국 고미술과 근현대미술에 대한 안목을 넓힌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박물관장이었던 이경성 교수의 지도를 받아 석사학위 논문으로 '청전 이상범 산수화 연구'를 쓸 정도였다. 교수님 연구실에 꽂혀있는 그 논문을 봤을 때 서양화 전공하신 분이 동양화가와 관련된 논문을 썼을까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조금은 알겠다. 그의 바람에 흔들리는 연두색 잡초들을 그린듯한 작품은 한때 지역의 대표 ○○소주 라벨에 사용된 적이 있어서 충북인이라면 친숙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는 작업노트에서 "나에게 있어 작업은 삶의 일부이며 삶의 충실한 기록이고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 나의 삶과 나의 작업이 다른 것일 수 없고 서로 얽혀서 돌아가는 하나의 둘레이다. 삶의 내용이 작업을 결정하며, 작업은 삶을 풍요롭게 하고 의미 있게 한다. 그러하기에 표현된 것이 아름다운 것이냐 아니냐에 대해서 유의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를 볼 때 그가 가식(假飾)을 싫어하고 지행합일(知行合一)적인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대학 졸업 후 전시장에서 교수님을 종종 뵐 수 있었다. 중앙일간지(D일보, 2002년 11월 21일자)의 '모노 톤의 단순미 모더니즘의 추억'이라는 기사에 교수님 작품이 실려있는 것을 스크랩해 전해 드리니 많이 기뻐하셨던 것이 기억이 난다. 이번에 이 글을 쓰며 교수님 추모화집을 보니 필자가 드렸던 신문기사가 실려있어 반가웠다.

교수님은 평소 증평 이야기를 가끔 하셨는데, 장인 어른(연규횡, 충북대학교 총장 역임) 고향이 이동우 미술관 옆 동네(증평군 도안면 화성리)다. 살아계셨다면 작업실을 손수 지으시고 애착이 많으셨던 교수님은 번듯한 제자의 작업실을 보시고 많이 기뻐하셨을 것이다. "작업실이 좋구먼, 이제 작업 열심히 하면 돼!"라고 특유의 말투로 말씀하실 것 같다.

2007년 4월 어느날, 학(鶴) 같이 고고하고 군더더기 없는 슬림한 체구, 나지막한 톤, 조용한 미소가 일품이었던 화가는 급성 임파선암으로 갑자기 이 세상 소풍을 마친다. 그의 묘비에는 '메마른 날들이 이어지더니 소리 없이 눈이 내린다. 주위의 고요함이 도드라진다. 큰 걱정 없이 이런 것을 느끼고 있을 수 있는 것도 복이다'라고 그의 작가 노트에 쓴 글이 써 있다. 오늘처럼 눈발이 내리는 날에는 교수님 생각이 많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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