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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5.12.21 15:33:17
  • 최종수정2025.12.21 15:33:17

이명순

수필가·한국어강사

택배가 왔다. 상자를 여니 배추김치, 총각김치, 백김치가 정갈하게 담겨 있다. 봉지를 여니 맛있는 냄새가 코끝에 스민다. 통에 나눠 담으며 맛을 보니 특히 백김치가 입맛에 딱 맞았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었다.

김장철이라 이 집 저 집 김장을 하느라 바쁜 나날이라고 한다. 나는 오랜 시간 망설이다가 올해는 김장을 안 하고 사 먹기로 결심했다.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강원도에서 농사를 짓는 분인데 직접 농사지은 재료로 김치를 담근다는 분을 믿고 주문했다.

김장을 하려면 준비할 것이 많다. 최근 몇 년은 절임 배추를 사서 편하게 했지만 이전에는 배추와 고춧가루는 물론이고 젓갈은 봄에 생멸치젓을 사서 내리는 등 유별나게 신경을 썼다. 다른 부재료 준비도 만만치 않은데 이렇게 사 먹으니 신경 쓸 일이 없어 편하기도 하고, 이제는 김치 소비량도 줄었으니 더 경제적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김치를 사 먹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지금까지 매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김장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어릴 때는 친정엄마를 도왔고 결혼 후에도 친정에 모여 김장을 한 후 형제 자매가 나눠 왔다.

친정엄마는 매년 이백 포기가 넘는 김장을 해서 우리 사 남매가 결혼한 후에도 넉넉히 나눠 주셨다. 연례행사 같았던 김장은 시골집 마당 우물가에서 배추를 절이고 한밤중에 나가 배추를 뒤집었고, 새벽부터 씻어 하우스 안에서 속을 넣었다. 아버지는 옆에서 장작불을 지펴주시며 간을 잘 맞춰야 한다고 하셨고, 엄마는 무뿌리가 길면 겨울이 춥다거나 입동에 김장을 하면 배추 맛이 쓰다는 등 삶의 경험을 들려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김장을 하며 생전의 아버지 이야기를 했고, 작년에 엄마마저 돌아가신 후에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여동생과 둘이서만 김장을 했다. 처음으로 부모님 없이 김장을 하며 엄마의 빈자리를 유독 크게 느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몇 년은 연로하신 탓에 직접 하시지는 못하고 마늘이며 파 까는 정도만 도와주셨는데 남동생은 엄마가 김장에서 손을 뗀 후부터 누나들도 맛은 있지만 예전의 엄마 김치 맛이 안 난다고 투덜대기도 했다.

맛있게 한다고 엄마보다 양념을 더 듬뿍 넣어도 엄마의 깊은 손맛을 딸들이 흉내내기란 쉽지 않았다. 삶의 깊이가 살아온 세월만큼 다르기 때문이다. 다양한 삶의 경험이 김치 속재료처럼 버무려져 우러나오는 그 깊은 숙성도를 우리는 따라갈 수 없다.

어릴 적 뒤꼍에 김장을 보관하는 볏짚 움막이 있었다. 땅에 묻은 항아리에 김치를 담고 그 위에 움막을 지어 보관하던 풍경, 동치미를 뜨러 가면 얼음이 얼어 칼끝으로 얼음을 깨트려 꺼내 왔던 추억이 새롭다. 이후에는 장독대 밑에 반지하실이 있어 거기에 보관하다가 김치냉장고의 시대로 변했는데 내 입맛은 여전히 예전의 그 김치맛을 그리워한다. 적정 온도를 맞춘 김치 냉장고 속 김치보다 추운 날 발을 동동거리며 꺼내 온 얼음이 서걱거리던 김치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제는 절임 배추와 속재료를 따로 사서 입맛에 맞게 버무릴 수도 있고, 완성품을 사서 편하게 먹을 수도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담가주시던 그 시원한 배추김치의 맛을 이제는 영영 맛볼 수 없기에 이번 겨울에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유독 더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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