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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5.12.21 15:34:27
  • 최종수정2025.12.21 15:34:26

최한식

수필가

-사십대 후반, 고집이 셀 것 같은 신장이 좀 작은 분이 찾아주셨네요.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름이 무척 길어요, 그냥 로트레크라 하지요. 그림을 좀 그렸지.

-그럼 선생께서 19세기 프랑스 화가로 밤 문화를 많이 다루신 '툴루즈 로트레크'신가요?

그래요, 안 되는 그림 몇 점 그렸더니 '후기인상파'라고 날 묶어 넣더라고.

-선생님 친구 분들이 그야말로 쟁쟁하잖아요, 몇 분이라도 이름 불러 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될 게 뭐 있겠어,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폴 세잔, 조르주 쇠라, 에드가 드가 그런 류의 화가들이었어.

-이름만 들어도 대단하다는 느낌이 확 오는데요.

그 친구들 보다야 내가 더 낫다고 해야겠지.

-하나같이 대단한 분들이지요, 미술사의 한 시대를 불꽃처럼 수놓은 분들이잖아요? 그분들과 같은 시대를 산 것만으로도 행복하시지 않아요?

착각이야, 착각. 모두 비틀거리며 혼돈 속에 한 세상을 살다 간 거야. 다 가난과 싸우며 시대를 탓하고 힘겨워하면서 술과 사랑에 미쳐 건강을 버려가며 살다보니 많은 이들이 단명했지. 그게 예술가의 운명이란 생각이 들어.

-선생님의 삶이 특히 극적이지 않았나요?

내 삶? 한 마디로 혼돈이고 모순이었지. 왜 '외유내강'이란 말 쓰잖아, 난 '내유외강'이었어. 약하니 강하게 보이려는 것 아니겠어.

-이런 말 조심스러운데 자존심이 무척 강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게 열등감의 다른 표현이야. 일단 내 외모에 열등감이 있잖아, 그게 컸지.귀족에 재능이나 성격은 누구에게 밀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몸이 자유롭지 못하잖아. 여성들 대할 때도 남과 같을 수 없었지. 당당한 척 했지만, 늘 주눅이 들었었지.

-선생의 이름을 생각하면 밤, 카페, 댄서, 매춘부, 장애, 물랭루즈, 포스터 같은 단어들이 떠올라요. 밤과 매춘부, 그런 주제에 특히 끌리신 이유가 있나요?

삶의 생생한 진실을 드러내는 시간과 사람들이라고 느꼈어. 달리 생각하면 그들도 혼돈이고 모순이지. 삶은 근본적으로 혼돈이요, 모순인거야.

-선생께 밤의 여인들은 어떤 의미였나요?

그들에게서 나를 보았다고 할까, 화려하고 비참한, 무시당하는 재능, 자유로운 듯 얽매인, 중독되어 사는 듯한, 생생한 삶의 진실, 한편으론 혼돈과 모순 속에 사는 복잡한 감정, 하나같이 나 자신인 듯 느꼈지.

-선생 작품 중 <세탁부>가 300억 이상에 경매되어 화제였던 적이 있어요. 그 작품 속 모델은 누구인가요?

'카르멘 고댕'이라고 내가 가장 아끼던 아가씨였지. 내 평생의 모델이었어. 그림 제목처럼 낮에는 세탁부, 밤에는 매춘부, 시간 나면 내 작품의 모델이 돼 두세 가지 일을 함께 한 억척스럽고 매력적인 아가씨지.

-그 작품이 왜 그토록 고가에 팔렸을까요?

나도 모르지, 내 솜씨보다 그림 자체가 빛나는 게 아닐까. 개성 의지 생명력 여인의 매력 그런 것들이 느껴지는 거겠지.

-선생은 심리묘사와 선의 사용이 대단해요, 무슨 비결이 있나요?

예술에 무슨 비결이 있겠어- 조금의 재능에 한없는 노력이 더해지는 게지. 굳이 남보다 다른 면을 찾자면 내 성격에 내 처지가 그랬던 거겠지. 눈치 보자면 자연히 심리를 읽게 되거든…. 서글픈 얘기야.

-많은 예술가들이 술에 중독되어 단명하잖아요, 그만한 이유가 있나요?

삶이 불안하고 고달파서 그래. 마음 붙일 곳이 예술 말고는 없잖아? 허전한 거야. 작품에 매달릴 땐 버티지만 작품과 작품 사이에 서럽고 슬프고 외롭고…, 그런 게 견디기 너무 어려워.

-이 추운 시대를 사는 청년들에게 한 마디 해 주시죠.

너무 따지지 말고 완벽하려고 하지 말아요. 삶에는 어차피 혼돈과 모순이 많으니까. 그저 현재를 열심히 살아요. 돈 안 되는 일을 열심히 하세요.

-모두 저무는 한 해 잘 넘기시고 희망찬 새해 맞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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