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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5.12.18 13:57:00
  • 최종수정2025.12.18 13:57:00

김병규

전 상당고 교장, 현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수련기획실장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근처에는 고색창연하나 사람의 손길이 담뿍 묻어나는 퇴계 종택이 있다. 이 종택은 동방 유학의 태두 퇴계 선생의 불천위 제사를 모시며 퇴계 후손의 적장자가 대대로 살아온 집이다. 퇴계 선생 사시던 곳에 300여 년 전 1715년에 도산서원 원장 창설재 권두경님이 6대 종손 이수경 옹과 힘을 모아 종택을 처음 지을 때 추월한수정(정자)은 선생 제자 후손들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다. 1907년 의병 활동 때 일본군의 보복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1928년 전국 450여 문중의 성금으로 정자가 재건되었으니 두 번이나 성금으로 건립된 셈이다. 선대 종손께서 이 정자는 우리 집 소유가 아니라 유림의 건물이라고 말씀한 연유도 여기에 있다. 추월한수는 선생 제자 고봉 기대승이 '퇴계의 마음은 가을 달이 찬 물에 비친 듯 맑고도 깨끗하다(秋月照寒水)'라고 한 말에서 비롯되며 불천위 제사의 제청 및 문중 모임 등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처음에 번듯한 수련원 건물이 없을 때는 추월한수정에서 숙식하며 수련생을 교육하기도 했단다. 지금은 선대 종손 가르침을 배우는 인기 프로그램이라 수련생이 제일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요즈음은 진성 이씨 중 뜻 있는 분들이 주간 당번을 편성하여 정자에서 외방객을 맞이하고 있다. 17대 종손 이치억 교수가 멀리 공주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어 종택을 대신 지키는 거다. 전 세무서장, 교장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진 분들 10여명이 교대로 종택에서 근무하는데 언제까지 하실 요량이냐 물었더니 종손이 돌아올 때까지이겠지만 부득이하면 죽을 때까지 봉사하겠단다. 이 얼마나 갸륵한 말인가. 다른 집안에서는 떼꼽만한 종갓집 재산을 울근불근 못 뺏어 먹어 안달하고, 종손을 우대하기는커녕 핍박하거나 송사가 빈번한 것과 너무 대비된다.

선대 종손이 작년 3월에 타계한 뒤 기년 탈상을 마치곤 금년 10월 25일에 길사(吉祀)를 통하여 차종손이 뒤를 잇게 되었다. 길사는 이름처럼 '즐거운 제사'로 진성 이씨 집안사람은 물론 경상도를 위시한 전국적인 행사요, 현 시대에서 보기 드물 뿐 아니라 자칫 사라질 문화유산이라 내외 막론하여 관심이 큰 행사이다. 얼핏 1,000여명을 맞이할 잔치라 한 치도 준비에 소홀할 수 없다. 집안에서 의례에 밝은 분들로 이미 1년 전부터 집행위원회가 조직되는데 이분들이 준비 모임을 철저히 하며 추호도 소홀함이 없도록 대비했다.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에 가만있는 것도 예가 아니라 식당에서 회의하실 때 식사비도 내 드리고, 정자 당번 분들의 점심용으로 컵라면 박스도 넣어 드렸다.

드디어 길사일이 되었다. 950명 정도 되는 축하객들 모두 초대장 없이 입소문으로 참석하셨단다. 환복소에서 유복으로 갈아입고 시도전 사인 후 노잣돈도 받고는 설레인 표정으로 길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길사 순서는 시도, 행사 및 식사 안내, 문중 운영위원장 인사, 진설, 행례(헌관 이하 제 집사 서립 설소과 출주 참신 강신 진찬 초헌례 독축 아헌례 종헌례 유식례 수조례 사신례)로 진행되는데 무려 1시간 넘게 소요된다. 그 동안 새로운 종손과 종부는 불천위 퇴계 선생을 비롯하여 조상님께 절을 올려 종손 됨을 보고 올린다. 나는 정자 마당 안에서 평생 볼까 말까 한 길사를 가까이에서 봤으니 이만도 큰 행운을 받은 셈이다.

정자로부터 첫째 열은 헌관 이하 축관들이 도열하고 둘째 줄은 내빈이고 셋째부터는 도포를 차려 입은 축하인사들이다. 대청마루에서 보고 있던 어르신이 내빈 줄에 앉아있는 집안 손님에게 '이보게 자네는 자리를 비워야겠네'라 하는데 세 명이 군소리 없이 일어나 장관급 인사들의 참례를 배려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막되어 먹은 사람이면 툴툴대거나 성질 낼만도 한데 다소곳이 물러난다.

전통문화가 점차 사라지고 우리 것에 대한 존중심도 약해 가는데 우리 다음 세대들도 이런 길사를 기쁜 마음으로 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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