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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5.12.18 13:58:07
  • 최종수정2025.12.18 13:58:07

남호순

시인·배바우도서관장

속리산으로 향하는 길은 짙은 단풍이 먼저 반긴다. 법주사로 들어가는 산길을 오르다 보면 발밑에서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고개를 들면 나뭇잎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물들어 있다. 같은 나무에서도 어떤 잎은 먼저 붉어지고, 어떤 잎은 끝내 초록을 붙잡고 있다. 서로 다른 시기를 살면서도 같은 가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꼭 우리네 삶과 같아서, 나는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그 빛깔들을 바라보았다.

법주사 경내에 들어서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처마 아래로 옮겨가고, 그제야 단청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서 보면 단풍과 닮은 색인데 가까이 다가가면 전혀 다르다. 단풍은 햇빛과 바람이 만들어낸 색이고, 단청은 사람의 손과 시간이 겹겹이 쌓아 올린 색이다. 자연은 한 계절을 쓰고 미련 없이 물러나지만, 단청은 여러 해를 견디며 같은 자리에 묵묵히 남아 있다.

법주사의 단청은 유난히 차분하다. 화려함을 앞세우기보다 기둥과 처마의 묵직한 무게를 고르게 나누는 색처럼 보인다. 비를 맞고 색이 바래면 다시 덧칠하고, 갈라진 틈이 보이면 메우며 그 자리를 지킨다. 사람들이 단청을 의식하지 않는 날에도, 단청은 말없이 법당을 떠받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시간까지 감당하는 묵묵한 무게가 느껴진다.

젊을 때는 단풍이 더 좋아 보였다. 한 철이면 충분히 빛나고 미련 없이 떨어지는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짧고 강렬하게 빛나다 사라지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법주사 처마 아래의 단청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계속 남아 있어야 하는 색, 사라지지 않기 위해 반복해야 하는 수고가 얼마나 큰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사람의 삶도 그렇다. 한 번에 완벽하게 물들기를 기대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쉽게 지워진다. 그럴 때마다 다시 붓을 들고 같은 자리를 채우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다. 같은 자리를 지킨다는 건 변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변화를 감당해왔다는 증거라는 것을 단청은 말없이 보여준다.

어느 해에는 단풍이 다 진 뒤에 법주사를 찾았다. 속리산 능선은 텅 비어 있었고 모든 색이 빠져나간 듯 보였다. 그때 단청이 유난히 또렷했다. 사라진 것들 뒤에 남아 있는 색, 비워진 자리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날 깨달았다.

단풍이 떨어지며 계절을 넘길 때, 단청은 남아 있으면서 시간을 건넌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제 나는 단풍만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법주사에 가면 일부러 고개를 늦게 들어, 처마 아래 묵묵히 남아 있는 색을 먼저 확인한다. 내 삶 또한 화려하게 물들 줄도 알고, 바래져도 다시 그려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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