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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거실의 난초가 꽃을 피웠다. 한 열흘 따스하더니 봉오리가 맺혔나 보다. 반가운 마음에 볕 잘 드는 곳으로 옮겼다. 볕을 보면 금방 피겠다 싶어 그리한 것인데 웬걸 닷새가 넘었건만 입을 꼭 다문 채 필 기미가 아니다.

조급한 마음에 한동안 속을 끓였다. 하지만 기왕 볕을 쬘 거면 창가에 내놓기로 했다. 서느름한 탓인지 사나흘 지나자 금방 봉오리가 도드라졌다. 양달에 둘 때는 그저 맺혔다고만 여겼는데 지금은 금방이라도 필 듯 톡톡 벌어졌다.

며칠 후 꽃이 피었다. 꽃이 귀한 섣달에 특별한 아름다움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예쁘고 단아한 꽃이 서늘한 창가에 핀 모습을 보니 산뜻한 느낌이다. 바깥 공기와 거실의 훈기가 만나 이슬까지 맺히곤 해서 지고한 품위를 더 해 주었다.

좋은 꽃 보려거든 창가에 내놓으라고 했지. 서늘한 것도 부족해서 이슬까지 맞히라 했지. 우리 역시 향기로운 이름 때문에 차가운 데서 자신을 훈련하고 다스리는 걸까. 예쁘기는 하되 열흘 남짓인데 찬 기운을 돋우고 이슬을 맞아야 했다. 뭔가 이루려 하면서도 쾌적한 조건만 추구하는 우리를 한 송이 꽃이 타박하는 것 같다.

저녁에는 단풍잎을 꺼내보았다. 해마다 가을이면 서너 개씩은 따다가 책갈피에 넣어두었다. 물이 들기 시작할 때의 단풍은 볼수록 곱지만 가을이 깊어가고 찬 이슬에 덮이면 붉은 잎은 코팅이나 입힌 듯 투명하다.

서리까지 뿌려대면 냉기가 돌만치 곱다. 된내기에는 잎이 떨어져도 서리는 채색을 입히는 효과라 그 때야말로 단풍의 진수가 나온다. 이슬이 엉기고 서리가 내릴 때는 유달리 맑은 것처럼 냉기가 가시고 한나절이 되면 단풍은 붉게 붉게 칠한 것처럼 선명하다.

그림은 덧칠할 경우 흉해지나 그 때는 붉은 빛깔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국화도 차가운 속에서 돋보였으니 좋은 시절 다 버리고 추울 때 피는 이들에게서 눈물로 덧칠하는 삶을 보기도 한다.

나 자신 창가에 머무르는 삶을 기피해 온 것 같아 생각이 많다. 원하기는커녕 피하려 하지는 않았을까 싶어 수수롭다. 찬 기운과 이슬에 고와지는 것처럼, 시련 속에서 원만한 인격이 형성된다.

예쁜 것에 팔리다가는 시련과 어려움은 극복하지 않고 쾌적한 여건만을 탐하게 된다. 말은 그래 왔지만 단풍을 말리면서도 유달리 고울 수 있는 배경은 무시해 왔다. 한 송이 꽃과 한 장 단풍잎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아울러 깨우친다.

꽃잎 한장 보기 위해 창가에 내놓듯이 고귀한 사람이기를 추구한다면 어둡고 후미진 삶도 피할 건 아니었다. 찬 이슬 머금어 그리 고운 빛깔을 연출하는 자세가 단풍보다 고왔던 것을 숙지하는 셈이다.

문득 코끝에 향이 묻어난다. 창가에 내놓지 않았어도 꽃은 피었을 것이나 그윽한 향은 아니었으리. 거실에 두면 더 소담하고 풍성할 수 있으나 겨울에도 향기로운 꽃으로 피지는 못했을 것이다. 혹여 향은 풍길지언정 차가운 속에서 엉긴 내음과는 격이 달랐을 테니까.

한송이 꽃조차도 제대로 피려면 찬 이슬과 냉기를 감수한다. 밤이면 기온이 뚝 떨어지는 곳에서 아주 예쁜 꽃망울을 새기듯 어려운 상황이라야 참된 인격의 정수가 나온다. 찬바람에 떨고 이슬에 젖을 것 알고도 좋은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내놓는 것처럼 삶의 향기를 위해 무엇이든 감수할 각오를 다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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