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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5.12.04 14:40:15
  • 최종수정2025.12.04 14:40:15

고미화

무심수필문학회 회장

오래 묵은 사물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집 안에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 했던 물건이 신발장 서랍에 가지런히 누워 있다. 까맣게 잊고 있던 다듬잇방망이를 마주하게 된 건 이사 덕분이다. 포장이사 업체 직원이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이곳에 넣어둔 모양이다. 두 개의 방망이를 꺼내 들었다. 수십 년의 손때가 묻은 짙은 갈색 나무가 매끄럽게 손에 안긴다. 반들반들한 몸피의 유려한 곡선이 여인상을 연상하게 한다. 아득한 시간의 샘에 갇혀있던 서사가 파노라마를 펼쳐 놓는다.

 어머님께서 사용하시던 이 방망이가 내 손에 쥐어졌던 때는 40여 년 전이다. 생활의 초점이 가사家事에 맞춰졌던 신혼 시절이었다. 가풍을 익히기 위해 어머님 말씀에 집중했던 시기, 부모님께 큰절로 아침 문안 인사 올리는 것으로 일과가 시작되었다. 아버님과 남편의 출근 배웅을 마치고 나면, 어머님께 주부수업을 받았다. 김치담그기를 비롯한 간장과 된장, 고추장 등 절기에 맞춰 장 담그는 법을 배웠다.

 전남 장성이 고향이신 어머님은 열녀문을 하사받은 조상의 후손임을 큰 자랑으로 여기셨다. 집안의 화평을 위한 여성의 덕목을 강조하셨던 어머님은 며느리를 데리고 다니시며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인사를 시키셨다. 때로 어머님의 가르침 속에서 세대 차이와 가치관의 충돌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어머님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했다. '새댁'이란 어색한 호칭에 적응하며 3개월 동안 집안에서도 한복을 입고 지냈다. 집 근처에 '관악여자상업학교'가 있었다. 저녁 찬거리를 사기 위해 시장에 다녀올 때쯤이면 야간 반 학생들의 등교 시간이었다. 한복차림으로 장바구니를 들고 오면, 뒤에서 여학생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와! 나도 저렇게 살고 싶어.'라는 소리가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세탁기 사용을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어머님은 손빨래를 선호하셨다. 이불 빨래는 손이 많이 갔다. 광목 이불 홑청을 뜯어 세탁하고 적당히 마르면 어머님과 마주 앉아 양손으로 천을 잡아당기면서 접은 후, 다듬잇돌 위에 놓고 방망이로 다듬질했다. 친구들은 내게 어느 시대에 사는 사람인지, 1985년도의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사는 게 맞느냐고 놀리곤 했다.

 첫째 아이가 어렸을 때였다. 남편의 대학 친구들 부부 모임에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부모님께 미리 말씀드리고 허락을 얻었다. 가벼운 외출도 눈치가 보였던 시절이라, 여행 전날 밤엔 아이처럼 마음이 설렜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작은 해방감을 고대하며 가방을 챙기는데 어머님께서 부르셨다. 이불을 거실에 내놓으시며 아이가 이불을 더럽혔으니 이불 홑청을 벗겨서 세탁하라고 이르셨다. 순간 이어진 아버님의 호통에 깜짝 놀랐다. '이 밤중에 무슨 이불 빨래?'라고, 처음으로 며느리 앞에서 어머님께 역정을 내셨다.

 스물다섯 살 새댁의 애환이 서린 방망이를 다시 살펴본다. 매끄러운 몸피 곳곳에 실금 같은 홈이 패어 있다. 나보다 어머님의 손길이 더 많이 닿았을 나무 방망이에서 녹록지 않았던 어머님의 삶을 헤아려 본다. 다듬질을 통해 펴진 건 천만이 아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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