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많음동두천 -0.5℃
  • 맑음강릉 5.8℃
  • 구름많음서울 1.1℃
  • 흐림충주 0.3℃
  • 흐림서산 3.6℃
  • 흐림청주 1.8℃
  • 구름많음대전 3.0℃
  • 구름많음추풍령 1.7℃
  • 맑음대구 5.1℃
  • 맑음울산 5.9℃
  • 광주 3.6℃
  • 구름조금부산 6.3℃
  • 구름많음고창 5.4℃
  • 구름많음홍성(예) 4.2℃
  • 제주 7.9℃
  • 흐림고산 7.4℃
  • 구름조금강화 1.6℃
  • 흐림제천 -1.2℃
  • 흐림보은 1.0℃
  • 구름많음천안 2.6℃
  • 흐림보령 4.1℃
  • 흐림부여 4.0℃
  • 흐림금산 2.5℃
  • 구름많음강진군 7.1℃
  • 맑음경주시 5.3℃
  • 맑음거제 7.9℃
기상청 제공

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이동우의 그림 이야기 - 마지막 문인화가 월전 장우성

  • 웹출고시간2025.12.03 15:56:50
  • 최종수정2025.12.03 15:56:50
클릭하면 확대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월전 장우성이 그린 충무공 이순신 영정.

ⓒ 이동우
유학파와 미술학 박사학위가 흔한 요즘은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제도권 교육은 전혀 받지 않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도제식으로 그림을 배워 우리나라 최고의 미술대학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고, 94세까지 장수하며 화단의 큰 어른으로 힘께나 썼던 작가가 있다. 그렇게 복 많은 작가는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이다.

일반인들은 장우성이 누구인지 잘 몰라도 아산 현충사에 걸려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영정을 그린 이가 바로 월전 장우성이다. 장우성(1912~2005)은 충주에서 출생해 2살 때 여주로 이사해 성장했다. 이당 김은호(1892~1979) 문하에서 한국화를 배워 2년 만에 선전(1932)에 입선하고, 12년 후에는 추천작가가 돼 화가로서 탄탄대로를 달린다. 그는 평생을 한국화의 새로운 형식과 방향을 모색하고 우리 화단을 이끈 한국 미술계의 거장이다. 동양 고유의 정신과 격조를 계승하고 현대적 조형 기법인 '신문인화'로 해방 이후 새로운 미술의 형성과 발전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월전은 시서화(詩書畵)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아는 마지막 문인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90세의 나이에도 휴대폰을 든 신세대 아가씨의 모습을 그릴 정도로 젊은 감각을 잃지 않았다.

윤여환 화가가 그린 유관순 영정.

ⓒ 이동우
또한 그는 뛰어난 예술가이자 교육자였다. 194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창설 때부터 몸담았고, 1960년대 후반부터는 홍익대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한국 동양화단의 거목이었던 서세옥, 박노수, 권영우 등을 비롯한 중진 작가 대부분이 월전의 제자들이다.

월전은 역사적 위인들의 영정을 많이 그렸다. 대한민국 표준영정 제1호인 충무공 이순신 영정은 본인의 얼굴과 닮게 그렸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고 그의 친일행적을 이유로 유관순의 영정이 정부표준영정에 문제가 있다며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유족들은 장우성이 "일제강점기에 화가로 입문하기 위해 상을 받고 활동을 했을 뿐이다"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당시 월전의 유관순 정부표준영정은 유 열사가 고문으로 얼굴이 부어 있는 상태의 사진을 참고해 그렸기 때문에 제대로 된 얼굴을 찾자는 논의가 다시 일어난다. 우여곡절 끝에 월전이 사망하면서 윤여환 작가가 유관순의 정부표준영정을 새로 제작하게 된다. 윤여환이 제작한 유관순의 영정은 2007년에 정부표준영정으로 새로 지정됐다. 필자는 천안시 병천에 있는 유관순 사당에 갔을 때 태극기를 들고 비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 영정을 본 적이 있다. 월전은 금관문화훈장과 여러 훈장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 전 선전(鮮展)에서 각광 받고 일제강점기에 활발하게 활동한 전력 탓에, 광복 후 친일미술가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친일행적을 살펴보면, 1940년 조선미술가협회는 1943년 징병제실시기념 '반도총후미술전'을 개최했다. 어떤 작품인지 확인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 공모전에 월전은 '결전 미술전 일본화부'에 작품을 응모해 입선한다.

장우성 작가가 그린 유관순 열사.

ⓒ 이동우
후일 월전은 자신이 수집한 엄청난 양의 고서화를 이천시에 기증했고, 이천시는 이를 바탕으로 '이천시립 월전미술관'을 지었다. 그런데 일부 시민들은 선전에서 입선한 작품들을 트집 잡아 친일파라 비난했고 한편에서는 다양한 화풍보다는 한 갈래의 화파를 중시하고 화단의 특정 인맥을 이끌었다고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우리 화단의 큰 병폐인 '끼리끼리 문화'를 만드는데 앞장 섰다는 것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친일적인 작품 활동에 대해 "광복이 되자 민족문화를 이루려는 거대한 각성이 일었다. 나 또한 이제까지 바른길을 오지 못했구나 싶어 일본 그림의 요소를 지워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하며 과오를 인정했다.

월전은 1983년에 친일 행위를 부인하다가 ​2003년에서야 회고록에서 "노망이라 웃어버릴지 모르나, 만년의 일들은 후인의 엄정한 평가에 맡기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월전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일제강점기 친일행적은 한국 근현대사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예술가의 역할과 책임과 관련해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부분이다.

필자는 중·고등학교 국어, 미술, 음악 시간에 주옥같은 예술작품들을 접했는데, 나이 들어 그 작품을 만든 작가들 대부분이 친일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낀 배신감은 생각보다 컸다. 선생님들이 원망스럽고 이해할 수가 없다. 그분들은 왜 작품분석만 해주시고 작가들의 친일행적은 말해 주시지 않으셨을까· 친일작가를 우리 예술사에서 빼버리면 남는 것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친일행적이 있더라도 작품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은 버리고, 친일행적을 명확히 밝히고, 이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학생들에게 알려 줘야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합리화하는 작가들도 있겠지만, 처자식을 가슴속에 품은 채 이국만리 골짜기에서 나라의 독립만을 위해 숨져간 수많은 이름 없는 투사들을 생각할 때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면 안 된다.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이라는 단어가 문학작품에만 나오는 말들이 아니길 빌어본다. 친일작가 문제는 미래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이동우

미술관장·화가




월전이 그린 충무공 이순신 영정 - 월전 장우성이 그린 충무공 이순신 영정.
사진제공=이동우






윤여환 작 . 유관순 영정 - 윤여환 화가가 그린 유관순 영정.
사진제공=이동우






장우성 작. 유관순 열사 - 장우성 작가가 그린 유관순 열사.
사진제공=이동우



<문화>이동우의 그림 이야기(사진)

-마지막 문인화가 월전 장우성

유학파와 미술학 박사학위가 흔한 요즘은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제도권 교육은 전혀 받지 않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도제식으로 그림을 배워 우리나라 최고의 미술대학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고, 94세까지 장수하며 화단의 큰 어른으로 힘께나 썼던 작가가 있다. 그렇게 복 많은 작가는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이다.

일반인들은 장우성이 누구인지 잘 몰라도 아산 현충사에 걸려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영정을 그린 이가 바로 월전 장우성이다. 장우성(1912~2005)은 충주에서 출생해 2살 때 여주로 이사해 성장했다. 이당 김은호(1892~1979) 문하에서 한국화를 배워 2년 만에 선전(1932)에 입선하고, 12년 후에는 추천작가가 돼 화가로서 탄탄대로를 달린다. 그는 평생을 한국화의 새로운 형식과 방향을 모색하고 우리 화단을 이끈 한국 미술계의 거장이다. 동양 고유의 정신과 격조를 계승하고 현대적 조형 기법인 '신문인화'로 해방 이후 새로운 미술의 형성과 발전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월전은 시서화(詩書畵)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아는 마지막 문인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90세의 나이에도 휴대폰을 든 신세대 아가씨의 모습을 그릴 정도로 젊은 감각을 잃지 않았다.

또한 그는 뛰어난 예술가이자 교육자였다. 194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창설 때부터 몸담았고, 1960년대 후반부터는 홍익대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한국 동양화단의 거목이었던 서세옥, 박노수, 권영우 등을 비롯한 중진 작가 대부분이 월전의 제자들이다.

월전은 역사적 위인들의 영정을 많이 그렸다. 대한민국 표준영정 제1호인 충무공 이순신 영정은 본인의 얼굴과 닮게 그렸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고 그의 친일행적을 이유로 유관순의 영정이 정부표준영정에 문제가 있다며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유족들은 장우성이 "일제강점기에 화가로 입문하기 위해 상을 받고 활동을 했을 뿐이다"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당시 월전의 유관순 정부표준영정은 유 열사가 고문으로 얼굴이 부어 있는 상태의 사진을 참고해 그렸기 때문에 제대로 된 얼굴을 찾자는 논의가 다시 일어난다. 우여곡절 끝에 월전이 사망하면서 윤여환 작가가 유관순의 정부표준영정을 새로 제작하게 된다. 윤여환이 제작한 유관순의 영정은 2007년에 정부표준영정으로 새로 지정됐다. 필자는 천안시 병천에 있는 유관순 사당에 갔을 때 태극기를 들고 비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 영정을 본 적이 있다. 월전은 금관문화훈장과 여러 훈장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 전 선전(鮮展)에서 각광 받고 일제강점기에 활발하게 활동한 전력 탓에, 광복 후 친일미술가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친일행적을 살펴보면, 1940년 조선미술가협회는 1943년 징병제실시기념 '반도총후미술전'을 개최했다. 어떤 작품인지 확인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 공모전에 월전은 '결전 미술전 일본화부'에 작품을 응모해 입선한다.

후일 월전은 자신이 수집한 엄청난 양의 고서화를 이천시에 기증했고, 이천시는 이를 바탕으로 '이천시립 월전미술관'을 지었다. 그런데 일부 시민들은 선전에서 입선한 작품들을 트집 잡아 친일파라 비난했고 한편에서는 다양한 화풍보다는 한 갈래의 화파를 중시하고 화단의 특정 인맥을 이끌었다고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우리 화단의 큰 병폐인 '끼리끼리 문화'를 만드는데 앞장 섰다는 것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친일적인 작품 활동에 대해 "광복이 되자 민족문화를 이루려는 거대한 각성이 일었다. 나 또한 이제까지 바른길을 오지 못했구나 싶어 일본 그림의 요소를 지워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하며 과오를 인정했다.

월전은 1983년에 친일 행위를 부인하다가 ​2003년에서야 회고록에서 "노망이라 웃어버릴지 모르나, 만년의 일들은 후인의 엄정한 평가에 맡기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월전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일제강점기 친일행적은 한국 근현대사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예술가의 역할과 책임과 관련해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부분이다.

필자는 중·고등학교 국어, 미술, 음악 시간에 주옥같은 예술작품들을 접했는데, 나이 들어 그 작품을 만든 작가들 대부분이 친일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낀 배신감은 생각보다 컸다. 선생님들이 원망스럽고 이해할 수가 없다. 그분들은 왜 작품분석만 해주시고 작가들의 친일행적은 말해 주시지 않으셨을까· 친일작가를 우리 예술사에서 빼버리면 남는 것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친일행적이 있더라도 작품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은 버리고, 친일행적을 명확히 밝히고, 이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학생들에게 알려 줘야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합리화하는 작가들도 있겠지만, 처자식을 가슴속에 품은 채 이국만리 골짜기에서 나라의 독립만을 위해 숨져간 수많은 이름 없는 투사들을 생각할 때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면 안 된다.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이라는 단어가 문학작품에만 나오는 말들이 아니길 빌어본다. 친일작가 문제는 미래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