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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충북여고 교장

때때로 걸을 기회가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걷는다. 한두 시간 짧은 코스를 걸을 때도 있고, 가끔은 온종일 걸리는 길을 걷기도 한다. 운동을 이유로 자전거 라이딩에 빠졌던 시절도 있었다. 하루 백 킬로미터를 넘게 달리는 경우도 많았다. 길게 뻗은 길을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 어느 방향으로라도 발걸음이거나 페달을 밟는 동작은 여전하되 문득 둘러보면 주변 풍경이 어느새 바뀌어 있곤 한다. 나지막하고 잔잔한 산을 지나는 길이 울창한 숲 우거진 깊은 계곡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널따랗게 펼쳐진 벌판을 만나기도 한다. 평탄하게 쭉 뻗었다가도 굴곡진 오르내리막에 사람 한 명 지날 정도의 좁은 흙길이 나타나는 때도 많다. 이동하는 거리가 길어지고 들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풍경은 때로 극적으로 달라지기도 한다.

걷거나 달리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면 풍광이 낯설게 바뀌어 있듯, 그렇게 살아감은 여전하고 어제의 일상을 오늘과 내일 다시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음에도, 잠시 짬을 내어 주변을 둘러보고 세상을 살펴보면 뚜렷한 경계도 없이 무엇인가 익숙하지 않은 장면들 혹은 언어들과 소리들, 의미들이나 온도들이 문득문득 그러나 느닷없이 감각을 새로이 일깨우곤 한다. 마치 걸어가는 길의 풍경이 바뀌듯 살아감의 공기가 변화하고 있음을 일러준다.

어느 순간에는 세상을 뒤흔드는 고통스럽거나 충격적인 뉴스가 한동안의 시간을 가득 채우기도 하고, 빈도는 많지 않아도 가슴을 따뜻하게 데우는 소식이 마음을 녹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특별한 사건이 늘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동소이한 일상속에서 격랑을 일으키는 소식이 들려올 때조차도 일상의 삶은 거의 여전히 어제의 방식대로 진행된다. 그럼에도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표정이나 대화, 몸짓에서 떨어져 나오는 파편들에서 어떤 미묘한 새로운 흐름이 읽혀지곤 한다. 크고 작은 뉴스와 소식들이 세상을 조금씩 틀어버리기도 하겠거니와 소소하여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무엇인가에 의해 공기의 성분이며 농도가 바뀌고 풍경이 달라지기 때문이리라.

벌써 십이월이다. 낯설거나 익숙한 풍경들이 흐르고 변해오는 동안 올 한 해도 여기저기 적어두었던 계획들이며 급한 대로 꽂아두어 어수선해진 책장과 생각들을 갈무리할 때가 되었다. 이런 종류의 작업은 그동안 꽤 많이 반복해 온 만큼 이제 새로울 것이 없음에도 하나하나 살피다 보면 길이 어느새 달라진 듯 새로움을 만나게 된다. 살아감의 프레임이야 다소 느릿하게 달라질지라도 그 속의 내용물들은 그렇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새삼스레 실감하는 것은 지난 뒤에 돌아보는 시간은 참 짧다는 사실과 더불어 온갖 종류의 비가역성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 익숙하고 푸근하여 돌아가고 싶은 장면들이며 기대로 부풀어 올랐던 어느 구간들은 기억이나 수첩의 몇 줄 메모로나 남게 될 것이다.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기준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종류의 변화든 잠시의 이탈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롭게 만들어가는 궤적이라는 생각, 새로운 가치와 기준들은 이미 자신의 동력을 얻어 나름대로의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달라진 풍경처럼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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