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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초록이 바랜 덤불 사이로 빠꼼이 작은 열매들이 마지막 햇살을 즐기고 있다. 겨울로 접어든 계절 언저리에 빛을 잃은 국화는 애틋한 여운을 남기고, 나무 끝에 나부끼는 마른 잎의 몸부림은 갈 곳 몰라 헤매는 영혼처럼 처연하다. 어쩌다 바람이 한꺼번에 밀려올 때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노란 은행잎의 군무가 참 아름답다. 짓궂게 불던 바람이 잠시 머문 틈에 한 장의 낙엽이 천천히 내려앉는다. 마치 긴 여행을 마친듯한 얼굴로 땅 위에 얹힌 낙엽은 오래된 기억의 조각을 건넨다. 비단이불을 깔아 놓은 듯 나무 아래 수북이 쌓여 "그래 우리 모두 아름다웠어"라고 소곤대는 낙엽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떼구르르 구르다 어디론가 떠나가는 가랑잎에 괜한 연민을 느끼는 건 왜일까.

가을걷이를 끝낸 들녘에 서면 휑하니 마음에도 찬 바람이 분다. 그렇다고 스치는 바람이 싫은 건 아니다. 쓸쓸하고 공허가 배어있는 11월의 체취가 나는 좋다. 빈들의 무채색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셔 본다. 신선하고 달콤하다. 언덕 위 군락을 이룬 억새들과 눈 맞춤도 하고 졸졸 흐르는 개울물에 얼굴을 비쳐도 보고 만산홍엽 만추를 만끽함이 내가 누리는 소소한 낭만이다.

우리의 인생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 걸까. 추수감사절을 맞아 강단에 장식해 놓은 풍성한 과일 바구니들과 탐스럽게 익은 늙은 호박, 향기로운 햅쌀과 붉은 수숫단, 무와 배추 그리고 푸르른 대파 묶음과 갈대 다발…. 파릇파릇 돋아나던 봄날의 푸르름, 연이은 폭염 속에 너무 덥다고 아우성치던 사람들의 하소연에도 의연히 자기 몫을 살아낸 만물의 결실 앞에 겸허히 고개를 떨군다. 잘 여문 우주의 모든 만물마다 창조주의 은혜요 감사가 가득하다. 감사절, 그러고 보니 내가 받은 사랑과 내가 누린 축복들이 과분하리만큼 크고도 많다. 잠시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본다. 과연 나는 잘살고 있는 걸까. 한참 동안 잊고 있던 병상의 지인이 떠올랐다.

예배를 마치고 친구와 둘이서 지인이 입원해 있는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나보다 다섯 살 연하이며 예전에 함께 성가대를 섬기던 믿음의 동무이다. 원치 않는 질병으로 벌써 칠 년째 암과 싸우고 있다. 곁에 없으니 그녀의 고통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삼 년 만의 해우가 아닌가. 부끄럽고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굽이굽이 산골길로 한 시간을 달렸다. 오늘따라 황량한 들녘이 서글프게 다가온다. 마치 그녀가 홀로 견디는 광야 길처럼, 어떤 모습일까 나를 기억은 할까· 병실로 들어서는데 불현듯 두려움이 밀려왔다. 혼자서 걸을 수도 일어설 수도 없는 그녀가 먼 산을 응시하듯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가물가물한 기억들 속에 나를 찾는 그녀의 어눌한 몸짓이 비통하기만 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가련하고 애처로워 나는 그녀의 발치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동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건 작은 눈물방울뿐, 바람이 점점 차갑다. 내마음에 마지막 잎새 하나 파르르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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