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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규

시인·화가

단풍 들고 낙엽처럼 많은 사연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오늘은 거리와 들녘에 찬 바람 불고, 펑펑 눈 내리는 아득한 겨울, 금방이라도 당도할 것 같은 회색빛 날씨다.

세상 살다 보면 어느새 걸어온 길 멀리 있고, 오래전의 시간들이 꿈결인 듯 가물가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람도 먹고 입어야 살고 세간살이와 주거시설이 있어야 하니 부지런히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살이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해 살다 보면 마음 내키지 않더라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거기에 맞는 행동이나 마음을 정하여 일해야 하니, 젊은 시절 자연과 함께 했던 한적한 여행의 아름다운 시절은 그냥 추억뿐일 때가 있다. 이러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 내가 나에게 또는 사람들에게 마음 호젓하게 걷는 길을 안내하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나이 들수록 저물어 가는 감각의 더듬이를 일깨우기 위해 때로는 간절하게 당부할 때가 있다.

가을 내내 달항아리처럼 호젓한 마음으로/ 허허로운 길을 걷는 여유로움 있길 바랍니다// 가을 내내 아랫목에서 홑이불 뒤집어쓰고/ 편지를 쓰는 애틋한 시간 오리라 믿습니다// 가을 내내 황홀한 그리움, 아편처럼 기별이 와/ 몸살 같은 꽃, 피우는 날도 있기를 바랍니다// 가을 내내 울긋불긋 단풍 물드는 일처럼/ 시를 짓는 그런 밤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낙엽 지고 하얀 눈 내리는 아득한 겨울이 와도/ 나란히 걷던 길, 그 마음 변치 않길 바랍니다 - 2024년 계간《시와 정신》겨울호, 양선규 시,『당부』(전문)-

추분과 한로 지나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상강(霜降)을 건너니 북녘에서부터 남하하는 단풍을 배경으로 구절초, 숙부쟁이 등의 꽃들이 한가롭게 피어 절정을 이루는 늦가을이다. 아마도 이때가 일 년 중 가장 몸이 좋아하고 마음 넉넉한 계절이 아닌가 싶다. 잠시라도 분주한 마음 내려놓고 한적한 곳에 머물며 자신을 돌아보고 희미하게 꺼져가는 그 불빛, 인간 본연의 맑고 밝은 심성, 그 망각의 더듬이를 찾아 걷는 길이 있었으면 좋겠다.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믿음과 존경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과 신뢰가 있는 사람에게 신신당부(申申當付) 할 때가 있다. 신신당부를 직역하면 말을 거듭하여 어떠한 일을 간곡히 부탁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신신당부는 전국시대 초기, 초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인 굴원이 쓴 '시' 『이소(離騷)』의 한 구절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보릿고개 시절, 먼 곳으로 시집가는 딸에게 당부하는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 젊은 시절 군 입대 영장을 받고 입영장에 들어설 때 잡았던 두 손 놓고 하염없이 뒷모습 바라보는 부모의 간절함, 이역만리 공부나 산업현장으로 떠나는 자식의 뒷 모습에 기도하는 가족들의 마음에도 눈물겨운 애잔한 당부가 담겨있다.

누구나 세상살이 그리 쉽지 않고 녹록하지 않다고 한다. 두 다리 뻗고 쉽게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언제나 가을에 쓴 '시' 『당부(當付)』처럼 살수는 없더라도 깊어가는 가을 몇 순간만이라도 그러한 희망이라도 가져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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