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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5.10.21 16:41:25
  • 최종수정2025.10.21 16:41:25

남호순

시인·배바우도서관장

가을이 깊어 가면 이상하게도 봄이 떠오른다.

햇살은 봄처럼 부드럽고 바람은 아직 차갑지 않다. 들길을 걷다 보면 봄에 피던 풀꽃들이 다시 피어난다. 한 번의 생이 아쉬운 듯 봄에 다 피지 못한 여운이거나 미련으로 고개를 든다. 꽃잎은 더 얇고 색은 옅지만 그 연약함이 오히려 단단한 생의 의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가을은 봄을 품고 여름을 붙잡고 겨울을 예감한다.

그럼에도 오후 햇살이 벽을 기울게 할 때면 여름 끝물의 매미가 아직 남아 귀뚜라미와 음을 나눈다. 매미는 목청이 쉬도록 세상에 남길 수 있는 소리의 끝까지 쓰는 듯하다. 귀뚜라미는 창가에서 더 크게 운다. 사랑하는 이를 부르듯 오지 않는 사랑을 불러내려는 듯 가을의 저녁은 소리로 가득하다. 그 운치가 달빛을 더 둥글게 만든다.

하늘은 높고 대지는 멀어진다.

공기가 맑아질수록 나무의 속이 비워 간다. 감춰져 있던 풀숲이 드러나고 바람 앞에서 가벼워지는 법을 배운다. 나뭇잎이 떨어질 때마다 지난 계절의 나를 하나씩 놓는 기분이다. 떨어진 잎 위로 햇살이 부서지면 그 부서진 빛 사이로 서리가 내릴 준비를 한다. 아직 이른데도 새벽이면 풀잎 끝에 하얀 기운이 스민다. 겨울이 저만치서 손짓하는 듯하다.

가을은 계절의 다리를 건너는 중이다.

봄이 남기고 간 향기와 여름의 잔열 그리고 겨울의 그림자가 한데 얽혀 있다. 그래서인지 가을은 늘 바쁘고 복잡하다. 따뜻함과 쓸쓸함이 한날에 함께 찾아와 마음은 설레면서도 한쪽 구석이 허전하다. 낙엽이 지는 길을 걸으며 문득 나도 내 안의 한 계절을 지나고 있음을 모든 감각으로 느낀다.

사람의 마음에도 사계절이 있다면 가을은 그중 가장 어른스러운 계절일 것이다. 무르익음 속에 이별을 품고 끝을 알면서도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을의 꽃들은 더욱 눈부시다. 봄보다 늦게 여름보다 조용하게 피어나는 그 꽃들은 자기 생의 마지막 빛을 다해 세상을 밝힌다. 서리가 내려앉을수록 더 맑아지는 색은 어쩌면 인생의 황혼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이 계절의 문턱에 서면 봄을 그리워하지 않게 된다.

봄은 언젠가 다시 오지만 지금의 가을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담장 위에 장미, 늦게 핀 개나리 한 송이 그리고 냉이와 달래 서늘한 바람 한 줄기에도 시간의 결이 묻어난다. 다가올 겨울은 모든 흔적을 덮겠지만 그 아래엔 또 다른 봄이 자라고 있겠지.

그리하여 가을은 끝이 아니라, 봄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봄의 씨앗은 잠들고 잠을 덮을 눈이 내릴 것이다. 서리가 내린다고 슬퍼하지 말자. 봄 같은 가을이 있었기에 겨울 추위도 따뜻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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