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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저무는 여름 뜨락에 채송화 봉숭아 분꽃이 마지막 인사를 하는 듯하다. 꽃이 흘리는 눈물처럼 꽃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이 오늘따라 서글퍼 보인다. 여름내 화단을 밝히며 지나간 향수를 부르던 꽃, 가을이 오는 길목에 비스듬히 빗겨서 있다. 추억이 서린 봉숭아 꽃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꽃에서 어릴 적 코끝으로 스치던 풀 내음이 난다. 두툼해진 손이 어쩌다 씨앗 주머니를 건드린 걸까. "톡" 터지더니 일순에 껍질은 오그라들고 소리 없이 흩어지는 까만 씨앗들은 어느새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내 어린 유년의 시절은 비루하고 남루했다. 해진 신발 사이로 빗물이 들어오고 양말은 늘 발꿈치가 기워 있었다. 찐 감자와 밀 개떡으로 배를 채우던 가난한 시절, 우리 집 샘가엔 해마다 봉숭아가 한두 그루씩 피어있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여린 봉숭아는 어머니의 자싯물을 먹기도 하고, 해거름에 여러 형제의 발 씻은 흙탕물을 마시며 한 식구처럼 자랐다. 댑싸리 나무가 옹기종기 피어있는 파란 마당 가에서, 돌멩이 위에 봉숭아 꽃을 찧고 놀던 어린 날의 동심이 마냥 그리워진다.

추석을 맞아 긴 휴가로 손주들이 와서 사나흘 머물렀다. 아이들은 들며 나며 꽃밭에 피어있는 봉숭아꽃과 마주했다. 점점 사위어가는 봉숭아꽃에서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나는 먼 훗날 손주들이 오늘의 꽃곁에서 추억을 기억해 내길 바라는 마음에 흩뿌리듯 "담 밑 봉숭아는 화원에 핀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라는 글귀를 읊어본다. 나의 설명에 머리를 조아리던 큰 외손녀가 손톱에 꽃물을 들이자고 했다. 그 밑으로 사촌지간인 외손자도, 막내인 외손녀도 무조건이라며 동의했다. 바래져 가는 꽃잎이 아쉬웠는데 또 하나의 추억을 새길 수 있다니 한결 위안이 되었다. 연분홍 꽃과 초록 잎사귀들을 작은 절구 안에 넣고 번갈아 가며 방망이질을 한다. 아이들은 처음 해보는 봉숭아 물들이기가 얼마나 설레는지 서로 해보겠다며 어쩔 줄을 모른다. 우리들의 함박웃음 소리에 으스러져 가는 명반 조각과 소금 알갱이도 덩달아 키득거리다 까르르 웃는다.

봉숭아 물은 혼자는 어렵고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만 할 수 있다. 힘겨운 세상살이에 봉숭아 꽃으로 위안 삼는 이도 있고 농사일이 바쁘시던 어머니에게는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5남 1녀 중 늦둥이에 외동딸이던 나는 삶의 작은 여유도 없이 봉숭아 물 하나 들여 주지 못하는 어머니가 미웠다. 친구들의 빨간 손톱을 보다못해 어느 날 샘가에 핀 꽃을 따다 놓고 어머니를 졸랐다. 귀찮다 하면서도 나의 성화에 못 이겨 늦은 밤 봉숭아 물을 들여 주시던 어머니, 졸음 섞인 얼굴로 손이 예쁘다며 아주까리 잎으로 싸매 무명실로 동여매시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이튿날 풀어보니 손톱 가장자리까지 진하게 검붉은 물이 들어있었다. 마치 어머니의 오기처럼…. 내가 어른이 되어 내 딸들과 어머니, 삼대가 모여 봉숭아 물을 들이던 날의 회한들. 그 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던 날 어머니 손끝에 남겨진 봉숭아 추억도 우리 곁을 떠나갔다.

손주들의 고사리만 한 손을 펴서 손톱 위에 꽃을 올려놓았다.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고 하시던 어머니와의 숱한 추억들이 수놓아 간다.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달빛이 기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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