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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5.09.21 17:24:45
  • 최종수정2025.09.21 19:32:04

남호순

시인·배바우도서관장

가을 초입의 공기는 간사했다. 한낮에는 아직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어깨를 토닥이는 듯했지만, 해 질 녘이면 슬그머니 코끝을 스치는 바람 한 자락에서 짭짤한 가을 냄새가 났다. 마당 한쪽 밭에서는 아직도 여름을 못 잊은 매미들이 '맴맴' 애타는 사랑 노래는 닳아 빠져가지만 그 노랫소리 사이로 찌르르르 귀뚜라미의 청량한 가을이 약아 빠져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녀석들은 그렇게 서로의 계절을 겹쳐놓으며 얼레고 달래가고 있다.

나는 호미와 낫을 들고 고구마 밭으로 향했다. 무성하게 엉킨 덩굴손을 뻗어 서로를 붙잡고 땅속 깊이 얼마나 귀한 보물들을 숨겨두었을까. 초록의 바다 같던 고구마 밭에 서서 숨을 들이쉬니 흙 내음과 풀 내음이 한데 섞여 코끝을 간지럽혔다. 어렸을 적 여름밤 대청마루에 앉아 날아다니던 반딧불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때처럼 왠지 모르게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순간이었다. 반딧불이의 희미한 빛이 꼭 땅속의 고구마처럼 보였던 그때의 기억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지만 확실히 거기 있는 신비로운 존재 말이다.

호미를 잡고 억센 고구마줄기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햇볕을 실컷 받아 윤기가 흐르는 줄기들을 걷어낼 때마다 후둑후둑 땅을 붙자고 있던 발톱들이 떨어져 내렸다. 흙이 드러나자 본격적으로. 푹, 푹. 흙덩이를 들어 올릴 때마다 밭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친구들이 기지개를 켜는 듯했다. 붉은 흙 사이로 꿈틀거리는 큰 지렁이와 지네 들이 보이자, 나도 모르게 놀라 손을 움찔 거린다. 호미질 몇 번에 딸려 나오는 고구마를 신처럼 지키던 것들이 밝은 세상을 본 순간 서로 놀랐으리라.

내가 잠을 깨운 것인지, 눈부신 세상을 본다. 땅속에 있던 고구마가 지상에 나오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을 위해서 말이다. 호미 끝에 턱 하고 무언가 걸리는 느낌. 조심스레 흙을 파헤치자 흙투성이 얼굴을 한 붉은 고구마가 얼굴을 내밀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세상의 빛을 처음 만나는 듯 설렘이 가득해 보였지만 시간의 피는 하얗게 흘러내렸다. 지렁이와 지네들은 비록 놀랐겠지만 고구마는 어쩌면 이 넓고 새로운 세상을 처음 보는 기쁨에 잠겨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땅속 어둠에서 홀로 영양분을 먹고 자라 붉은 존재가 되다니!

투박한 고구마들을 하나씩 캐낼 때마다 마음은 둥글고 풍요로워졌다. 여름 내내 땀 흘려 가꾼 보람이 노란 분들로 응축되어 있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 고구마들이 겨울밤 군고구마가 되어 우리 가족의 저녁을 따뜻하게 데워줄 생각에 벌써부터 입가에 군침이 돌았다.

문득, 고구마 밭 한가운데 서서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다. 매미의 울음은 이제 완전히 잦아들고 가을의 심장 소리만이 밭 가득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마치 땅속에서 고구마가 캐져 나오는 순간처럼 나의 마음속에서도 작은 기쁨과 감사함이 솟아나는 하루였다. 올가을은 고구마처럼 붉고 달콤한 기억으로 가득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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