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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5.09.09 16:02:14
  • 최종수정2025.09.09 16:02:14

심재숙

시인·한국어 강사

심재숙정원에 상사화가 피었던 여름. 집을 드나들면서 상사화에게 안부를 물었다. 오래된 벗을 만나듯 반가워 한참씩 들여다보는 내게 상사화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초록빛 풀밭에 목을 길게 빼고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보는 분홍빛 진혼 나팔수. 다섯 개의 꽃잎을 밖으로 둥글게 말고 가느다란 꽃술은 안쪽으로 조심스레 당겨 세상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도통한 상사화는 언제 보아도 침잠에 들어있다. 늘 생각하는 꽃의 형상이다. 그 꽃을 들여다보는 사람 또한 여지없이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오늘은 꽃 속에 사람의 형체가 드리워졌다. 그런 이유로 평소보다 더 오래 상사화 곁에 머물렀다. 얼핏 나비가 너울대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한 여인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묘소 앞에서 손끝, 발끝의 섬세한 동작과 눈빛으로 한삼을 휘저으며 헌무를 올리던 무용수의 영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얼마 전에 김복진 조각가의 서거 85주기 추모문화제가 있었다. 김복진 조각가의 생가와 묘소가 있는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팔봉리를 다녀왔다. 팔봉리 마을이 가까워지자 길가에 늘어선 상사화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상사화를 보는 순간, 상사화는 꽃과 잎이 피는 시기가 달라 서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먼저 떠올랐다. 이어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이 무슨 예언처럼 따라왔다. 마치 85년 전에 가신 예술계의 거장 김복진 조각가와 추모제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엇갈린 관계와 흡사하다는 생각에 이르자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김복진 조각가의 추모문화제는 추모제에 이어 추모포럼으로 진행되었다. 동네 어르신들과 예술가들이 숲길을 따라 삼삼오오 묘소에 올랐다. 마을에서 숲길로 접어들자 축사와 복숭아 과수원이 산 중턱을 지키고 있었다. 묘소가 가까워지면서 호두나무가 실한 나뭇가지와 잎을 늘어뜨리고 호두를 움켜쥔 채 가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말끔히 벌초가 된 묘소에 이르자 땀을 식히는 시원한 바람이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묘소 가장자리를 지키는 휘어진 소나무도 단정하게 정리되어 멀리 선을 긋는 아름다운 능선과 다른 도시까지 볼 수 있었다. 묘비 앞에서 징 소리에 맞춰 추모제가 진행되었다. 향을 피우고 술을 따르고 절을 하는 동안 바람도 잠시 멈추고 새하얀 뭉게구름도 멈춰 섰다. 헌무가 이어지자 무용수의 몸짓에 따라 한삼 자락이 하얗게 휘날리고 손끝과 버선발의 곱고 가는 움직임이 아픈 세월을 보듬었다. 헌시가 낭독되는 순간에는 그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의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저마다 마음을 다독이며 다짐하고 결심하는 엄숙한 시간으로 마무리되었다.

추모제를 마치고 추모포럼이 이어졌다. 발제자들의 설렘과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시간이었다. 정관 김복진 조각가는 속리산 법주사의 미륵대불을 통하여 조각과 건축의 경계를 넘나들었으며, 시대적 물자 상황과 예술적 실험의 결합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대미술과 총연출자로서의 면모를 갖춘 종합적인 예술인으로 예술과 삶의 일체화를 통하여 예술은 삶의 일부라고 여기고 삶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음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까마득한 후배 예술인들이 김복진 조각가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흔적들을 보여 주었다. 그럴 때마다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미처 알지 못했던 귀한 것들을 깨닫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아울러 긴 세월 미처 알지 못했던 부끄러움과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감사함을 나누며 서로 눈빛을 교환하기도 했다. 동네 어르신들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시며 산증인으로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셨다.

조각가 김복진 선생은 그날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셨다. 상사화 피는 계절, 85주기가 돼서야 돌아오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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