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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설익은 것을 좋아한다. 시월의 농익은 냄새보다 가을 초입 떠도는 풋내가 더 끌린다. 하늘도 그때는 완전 파랗지 않았다. 가을장마는 지나갔어도 어쩌다 먹구름 틈으로 푸르게 물든 하늘이 앳되다.

이제 막 익기 시작하는 풋사과도 사각사각한 게 맛있었다. 밭 한 모서리 후벼 파면 애기 주먹 같은 고구마도 몇 개쯤 캘 수 있다. 발그레한 껍질은 물에만 씻어도 훌훌 벗어지고 예의 또 풋내가 느껴진다. 도라지 역시 얼마나 사근사근한지 살피듬이 뽀얗게 드러날 정도이다. 설익어도 되는 게 가을의 특권일까.

콩대를 꺾어 알불에 그슬리면 설익은 중에도 독특한 맛이 났다. 콩꼬투리와 깻송이도 웬만큼 익은 듯 노랗게 물드는 중이다. 코스모스도 수줍은 듯 풀밭에 숨어 피었다. 얄팍한 달맞이꽃은 창호지에 찍힌 무늬처럼 연하고 투명해서 꺾일까 조심스럽다. 그래서 신경이 쓰이고 좋아하는 것도 초가을 서정이다.

엊그제 도서관 근처의 카페에서 동무와 만나기로 했었다. 갑작스레 볼 일이 생겼다며 1시간은 늦어질 거란다. 통화를 끝낸 뒤 도서관 옆 공터로 향했다. 처서가 지나서인지 잡목으로 뒤덮여 있던 오솔길도 기세가 약간은 꺾였다. 입추의 여지도 없이 빽빽했던 녹음과는 달리 허룩해 보이지만 그래서 바람이 더 산들산들 불었다.

금방 1시간이 지났다. 여느 때라면 갈증이 나고 잠깐 쉬어야 할 텐데 풋풋한 그늘 때문인지 지루하지가 않다. 동무에게, 기왕 늦은 거 카페에 갈 것 없이 여기서 만나자고 전갈을 보냈더니 잠시 후 커피와 케이크를 사 들고 왔다. 널찍한 그늘을 찾아 다과를 즐기면서 적조했던 마음을 풀었다.

군데군데 들꽃 사이로 고추잠자리가 작은 비행기처럼 맴돈다. 조금씩 높아지는 새털구름과 수제비구름도 비린내가 날 듯 여리다. 줄곧 봐도 익는 중인데 농익은 것과는 거리가 먼 구월 이미지 그대로였다. 어쩌다 나무 그늘 밑에서의 호사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가을의 문턱에서 이제 막 시작되는 익힘을 보았다고나 할지.

다가올 시월이 옹골찬 느낌이라면 지금은 반숙한 계란처럼 어설프다. 풍성하게 익어가는 정경을 보면 조급할 때도 있으나 아직은 덜 익어도 무관하겠지 싶다. 살짝 영근 채로는 씨앗이 될 수 없다. 더더구나 싹도 틔우지 못하지만 상큼한 풋내는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라면을 끓일 때도 살짝만 익혀 먹었으니까. 된장찌개 역시 건더기로 넣은 호박이며 두부가 설컹거릴 정도로만 익힌다. 무른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익혀야겠지만 나로서는 벌써 조리가 끝난 시점이 된다. 풋내가 나기 쉬운 참나물과 시금치 또한 알맞게 잘 데친다. 설익은 풍경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초가을에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 또한 풋사랑이다. 손 한 번 잡는 것도 쩔쩔매는 소년 소녀의 귀여운 뉘앙스다. 특별히 이맘때 생각나는 걸 보니 나도 초가을 체질인가 보다. 설익은 과일이면서 농익기나 한 것처럼 뽐내는 것도 탈이지만 소박한 마음이면 괜찮다. 한낮의 볕은 뜨거워도 아침저녁으로는 시원한 구월의 익힘처럼 시나브로 영그는 소망을 품어본다.

해거름이 되었다. 그림자 하나 끌고 가는 산자락을 보니 가을은 가을이었나· 시월이면 본격적인 익힘이 시작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 그때까지만 감상에 젖는 폭이다. 초가을 풋과일이 설익은 채로도 가끔은 맛있는 것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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