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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5.08.21 15:48:04
  • 최종수정2025.08.21 15:4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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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 사계, 64.5×100.5㎝, 4ea, 종이에 수묵채색, 1966.

ⓒ 뉴시스
1936년 8월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올림픽의 꽃'이라는 마라톤 경기에 손기정이 일본 선수로 참가해 2시간 30분의 벽을 깨고 우승한다. 동아일보는 금메달을 딴 손기정과 동메달을 딴 남승룡의 사진을 입수해 유니폼에 그려져 있는 일장기를 지워서 보도한다. 이를 '일장기 말소사건'이라 부른다.

이 사건으로 신문사 직원들이 고초를 당했는데, 그 중에는 청전 이상범(1897~1972)이라는 그림 그리는 이도 있었다. 동아일보 미술 담당 기자였던 이상범은 사진의 일장기를 물감을 이용해 흐릿하게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청전은 40여일 간 구치소에 수감돼 있다가 언론계와 일체 연을 끊겠다는 서약을 하고 풀려나 본격적으로 전업 화가가 된다.

청전은 충남 공주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머니를 따라 10살 때 서울로 이사와 사립보통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학교에서 쫓겨난다. 이 때 그가 선택한 길이 그림 그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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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 설경, 90×213㎝, 1960년대.

ⓒ 뉴시스
그는 '경성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들어간다. 이곳은 최초의 근대식 미술학원으로 심전 안중식(1861~1919)과 소림 조석진(1853~1920)이 왕가의 후원을 받아 운영했다. 청전이 이곳에 문을 두드린 이유 중 하나는 돈 걱정 없이 그림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노수현(1899~1978)이라는 학생도 있었는데, 안중식은 자신의 아호인 '심전(心田)'에서 한자씩을 떼어 노수현에게 '심산(心汕)'을, 이상범에게 '청전(靑田)'이라는 호를 내릴 정도로 두 사람을 애제자로 아꼈다고 한다. 해방 후 이상범은 홍익대에서, 노수현은 서울대에서, 각각 후진을 양성해 현대 화단의 양대 인맥을 구축하게 된다.

1922년 조선총독부는 민족의식을 약화시키기 위해 조선미술전람회(선전)라는 공모전을 만든다. 청전은 뛰어난 재능으로 1회부터 마지막 23회(1944년)까지 선전에 참가했고, 4회부터 13회까지 10년 연속 특선을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17회부터는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심사위원까지 하는 영광(?)을 누린다. 이때 일본 심사위원들의 맘에 드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일본 남화풍의 '몽롱체' 화풍을 구사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청전은 천편일률적으로 이 몽롱체 화풍을 평생 고수한다. 어쨌든 화풍은 그렇다 치고 일장기 말소사건에서 애국심을 보여줬던 청전은 무슨 이유인 줄은 모르겠지만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손기정이 일본 선수로 올림픽에 참가한 것처럼 일제강점기에서는 일제가 주최하는 공모전에 참가하는 것은 큰 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조선미술가협회에서 이당 김은호(1892~1979)와 나란히 평의원으로 활동했고,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세 차례 개최된 '반도총후미술전'의 일본화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변절을 일삼는다. '반도총후미술전'은 황국신민화와 군국주의를 선양하기 위한 전시체제의 공모전이었다. 청전의 결정적인 친일행적은 일제 말 매일신보에 '나팔수'라는 삽화를 그렸다는 것이다. 1943년부터 조선인 징병제를 시행하게 되자 조선총독부의 대변지로서, 매일신보는 특집으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라는 시화를 기획했는데, 이는 조선 징병을 독려하기 위해 제작된 선전물이었던 것이다. 이 삽화는 일장기 아래서 기상나팔을 부는 병사의 뒷모습을 그린 것으로 필치와 연한 담묵 처리의 언덕 묘사가 청전이 즐겨 구사한 산수화풍이다.

세월이 흘러 청전이 세상을 뜬지 37년 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2009)'에 청전은 장남 이건영(1922~?, 월북화가)과 함께 미술 부문에서 선정돼 친일작가로 공인받는다. 특이하게 부자가 친일화가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것이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영원한 한국미의 전형을 수묵산수로 완성한 겸재 정선(1676~1759) 이후, 청전의 일생과 예술 세계를 더듬어가는 가운데서 그의 위치가 최대의 화가임을 발견했다. 겸재나 단원과 같은 한국 산수의 맥을 잇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독자적인 자기 세계에서 또 하나의 한국미의 전형을 확립했기 때문이다"라고 청전을 극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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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가 지난 13일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광복 80주년 기념전 '향수(鄕愁), 고향을 그리다' 전시작인 이상범 작가의 작품 '귀로'를 설명하고 있다.

ⓒ 뉴시스
위와 같이 후배와 동료들로부터 청전은 존경과 대중적 인기를 가장 많이 누린 작가였다. 미술계의 정치력과 인기에 걸맞게 그의 회화적 업적에 대한 평가는 최대의 찬사를 받은 것이다. 청전의 친일 활동은 그가 이룬 예술적 성과에 가려졌고, 이제까지 구체적으로 평가된 적도 없었다. 청전 또한 생전에 양심고백이나 반성도 하지 않았다. 청전의 친일 활동은 전체 문화예술계 친일행적을 살펴 봤을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미술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우리나라 대표적 예술인들은 대부분 친일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얍삽빠르게 친일을 했기에 많은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고, 지금도 교과서에 살아 숨쉬고 있다.

광복80년, 친일작가들의 작품과 얼굴이 떠오른다.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가능할까? 답답한 맘이 드는 광복절 아침이다.

이동우

미술관장·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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