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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란

수필가

친정엄마가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았던 말은 '엄마'였다. 그만큼 어머니에게 외할머니는 당신의 일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강인한 생명으로 숨 쉬고 있었던 것 같다. 러시아 태생 화가 마르크 샤갈(1887-1985)의 작품에는 이런 생명력을 지닌 기억들이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그를 색채와 빛의 마술사라고도 부른다. 이번 샤갈 작품 전시(한가람 미술관)는 그의 기억을 토대로 한 예술세계를 만나는 기회였다.

전시 작품은 크게 비텝스크의 기억을 비롯한 그의 뮤즈, 파리, 영성, 색채 등으로 나뉘어 167점이 전시되었다. 역시 강렬한 색채가 관람자의 시선을 잡는다. 하지만 고대했던 대표작 〈나와 마을〉은 오지 않았다. 대신 전시 벽에 붙은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도 눈이 내린다"로 시작되는 김춘수의 시를 읽어 보지만 왠지 아쉬움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아쉬움을 달래준 작품은〈러시아 마을〉이었다. 유대인으로 러시아 이주민이었던 그의 고향 비텝스크 마을에 대한 따스한 기억이다. 그림에서 시선을 끄는 건 엉뚱하게 나타난 하늘에 날아가는 수레다. 이뿐 아니다. 비텝스크 기억의 장에는 이런 동화 같고 공상화같이 떠다니거나 사물이 거꾸로 날아다니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순간 먼 기억 속, 어릴 적 내가 보았던 것, 상상하고 느꼈던 소박하고 정겹던 시골 풍경들이 다시 돌아와 내 앞에 서 있다.

그런데 찬찬히 보니 샤갈의 기억은 한 공간 한 시대에 머물지 않았다. 그림은 단지 어린 시절 당시만을 담은 게 아니다. 샤갈의 뮤즈 벨라로 추정되는 여인과 만나 사랑을 하고 아기가 태어나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평범한 인간 삶이 혼재한 모습으로 한 공간에 배치되어 있다. 한마디로 인간의 삶이 반복되는 모습 그 자체다. 남녀의 사랑으로 시작되어 아이를 안은 모성애 그들 곁에 존재하는 자연과 인간의 모습들이 모두 유기적 관계에 있음을 가리킨다. 심지어 천사가 나타나고 염소와 바이올린 소리도 삶의 원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면서 샤갈은 지난한 시간의 기억도 부른다. 유대 이민자로서 견뎌야 했던 가난과 미술에 대한 열정 거기다 전쟁의 파흔은 샤갈에게 고통과 슬픔의 기억들이며 피할 수 없는 생의 전장터였던 것. 또한 나치의 폭력을 피해 프랑스와 미국으로 떠나야 했고 그토록 사랑했던 벨라 마져 떠나보내야 했던 슬픈 기억이다. 샤갈은 이런 아픔과 고통을 기억에서 지우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상상으로 불러 예술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 모든 시간 상황 이야기들을 한 공간에 배치해서 그렸을까. 각각의 기억들을 한데 모아 그린다는 건 어찌 보면 단순하다. 단순하다는 건 그림이 건네는 의미가 명료함을 담고 있다. 때문에, 인간의 생 역시 출생과 성장 활동 늙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원으로 보고 있는 듯 느껴진다. 원은 직선과 달리 반복의 무한고리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기에 한 공간 속에 배치한 게 아닐까. 특히나 하다시의 스테인드 글라스나 라 퐁텐 우화와 출애굽기 등을 통해 머무는 기억보다는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세계를 창조했다는 건 샤갈 예술이 빛날 수 있던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흘러가 버리는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기술이다. 오늘 샤갈의 작품이 그걸 말하고 있다. 그가 버텨온 시간들이 아름다운 기억들만 있었던가. 누구든 슬픔과 기쁨, 고통과 시행착오는 있는 법. 어찌 아름다운 기억만 있겠는가. 그렇다고 잊고 싶다고 지운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자연스레 사라졌다 어느 날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게 기억인지 모르겠다. 샤갈은 어떤기억이든 그 기억에 머물지 말라 말하는 것 같다. 역시 그는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능력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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