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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5.08.17 16:03:42
  • 최종수정2025.08.17 16:03:42

박영희

수필가

굽이굽이 금강 물줄기를 따라 푸르른 길을 달린다. 태고의 만고풍상을 견뎌낸 탓일까. 위엄있어 보이는 산과 강의 풍광이 경이롭다. 산 그림자 드리운 푸른 강물은 윤슬만 반짝인다.

지척에 사는 올케언니들을 모시고 강바람을 쐬러 갔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 피를 나눈 혈연은 아니어도 오빠들과의 인연으로 우리는 한 식구요 가족이 되었다. 두 언니는 팔순을 바라보고 첫째 둘째는 여든을 지난 연세이건만 여전히 곱고 우아하다. 밥 한 끼 하자는 나의 제안에 열 일 제쳐놨다며 하나같이 좋아한다. 격변기를 살아온 올케들께 시집살이가 고되더냐고 물을 때면 시어머니 시집살이보다 가난이 더 큰 시련이었다고 한다. 그 시절엔 다들 그랬었다며 현대를 사는 지금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나는 외동딸이라는 이유로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오빠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자랐다. 내 나이 세 살 때 큰 올케를 맞이했으니 나의 유아기는 큰 올케가 엄마를 대신하기도 했다. 여중 입학을 앞두고 예쁜 속옷들을 사가 지고 와서 엄마 대신 나의 사춘기를 챙겨주던 사랑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사모관대를 쓴 오빠와 양 볼에 연지곤지를 바르고 족두리를 쓴 채 혼례식을 올리던 풍경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온종일 아랫목에 앉아있던 고운 신부가 예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여 새색시 앞을 아장거리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가부장적 사회제도에 맏며느리라는 자리는 얼마나 힘겨웠을까. 게다가 딸 같은 손아래 시누이의 투정은 어떻게 감당했을까. 굴곡진 세상에 고부간 동서지간의 갈등도 적잖았을 텐데, 속으로 삭였을 올케들의 의연함이 존경스럽다. 나무 수풀 우거진 산길을 가는 사이 여기저기 찻집과 식당들이 즐비하다. 큰언니가 간판들을 읊조린다.

초등학생 때였던가. 받아쓰기를 연습하다 큰 언니가 문맹이라는 것을 알고 너무 가슴이 아팠다. 글자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는데 끝까지 나를 피하던 모습, 어린 가슴에 어떡하면 언니에게 글을 가르칠까 궁리하며 밤을 지새운 날도 적잖았다. 청소년기를 보내면서도 나의 근심은 떠나지 않았고 이미 눈치챈 오빠들은 자존심이 상할까 봐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떻게든 글을 가르쳐 주겠다며 밤마다 애태우던 나의 꿈은 아침이면 물거품이 되었다. 용기도 없이 계획을 찾지 못한 나의 결심은 점점 시들해지고 삼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마침 동사무소에 한글 공부방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언니를 만나 가까스로 설득했다. 얼마를 망설이다가 비로소 공부방에 갔다. 가나다라…글을 하나씩 품게 되자 그간의 열등감은 도리어 자존감으로 변하고 늦깎이로 잡은 연필은 한 줄의 시요 눈물이 되기도 했었다.

나이 듦이 선물이라는 언니들은 노년이야말로 명랑하고 삶의 폭이 넓어지며 행복할 줄 아는 시기라고 한다. 성난 파도 같던 삶 앞에 도리어 강인해졌다는 언니들 고백에 노년의 참다운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인정스러운 언니들 앞에선 아직도 어리광이 나온다. 며칠 전 작은 수술을 받느라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날도 기도를 부탁하며 큰 올케께 전화를 드렸다. 대기실을 둘러보니 나보다 먼저 이미 올케 넷이 와 계신다. 언제나 단합된 힘의 상징이다. "우리 시누이님 잘 봐주세요" 하는 그들은 언제나 나의 그늘이 된다. 진심 고마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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