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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애

수필가

입추 이후 날이 제법 선선하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는 발걸음에 리듬으로 스민다. 대나무를 낭창거리게 흔들고, 플라타너스 푸른 잎사귀들을 살랑거리고, 치렁치렁한 버드나무 실가지를 스적이며 빚어내는 소리들은 노래가 된다.

바람의 노래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노을과 만나면 환상의 산책길이 된다. 꼭두서니 염료를 풀어놓은 듯 진한 다홍빛이 서편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하면 내 마음속 어딘가에도 채하가 드리운다. 묻어둔 그리움이 풀려나와 붉게 타는 풍경 속 한 점이 된다. 그럴 때면 문득 문득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토마스만의 동명소설을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이 제작한 영화다. 원작 소설에서는 주인공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가 소설가인데 영화에서는 작곡가로 등장한다. 예술에서도 한계에 부딪치고 몸도 쇠약해진 아센바흐는 요양차 베네치아로 휴가를 오는데 그곳에서 가족과 여행 온 미소년 타지오를 만나며 설렘을 느낀다. 그리스 석상 같은 소년에게서 오랫동안 간구해오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그의 마음은 에로스적 충동에 휩싸이고 동성애적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된다. 열정에 잠식당한 그의 시선은 늘 소년의 뒤를 쫓고 결국은 콜레라가 창궐하는 베니스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다.

광기를 부정하고 아폴론적 미를 추구하며 단호하고 엄격했던 그의 예술적 세계관은 그를 실패로 내몰았고 그토록 거부했던 디오니소스적 광기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타치오에게 미혹되며 그를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그는 노을빛이 여리게 반사되는 바닷가에서 타치오를 바라보며 신열 속에 스러진다. 그 장면 위로 말러의 5번 교향곡 4악장 아다지에토가 아름답고도 쓸쓸하게 흐른다. '아다지에토'는 말러가 1901년부터 1902년 사이에 만든 곡인데 당시 말러는 사랑과 죽음사이에 서 있었다고 한다. 여인과의 사랑으로 가슴이 요동칠 때 몸은 병으로 죽음의 위기를 맞고 있었으니 사랑과 죽음이 동시에 스며있는 곡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과 너무나 어울리는 곡이다.

애써 젊게 치장해 보지만 식은땀으로 흘러내리는 화장과 깊은 주름을 지닌 노장의 마지막 얼굴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길을 보여준다. 아름다움도 결국 거부할 수 없는 순환 속에 흘러갈 뿐이다. 비록 일그러진 얼굴로 떠나지만 그래도 그가 걸어온 과정은 아름다웠다고 말해주고 싶다. 고뇌하고 방황하며 살아내는 일이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니 말이다.

능소화 꽃처럼 저 고운 노을은 지는 하루의 마지막 모습이다. 낮이 짧고 강렬하게 꽃처럼 지고 어둠에게 자리를 내주면 새로운 또 하루가 잉태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 열어준 새로운 날들을 뜨겁게 살다가 지는 꽃이 되어 떠난다. 그리고 또 다른 하루를 열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루가 꽃 지듯 지는 시간을 걷노라면 그리움도 다채로운 감정들도 갈무리되며 침묵만으로도 넉넉하고 조금쯤 쓸쓸하면서도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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