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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두

시인·괴산문인협회장

개나리, 진달래가 봄의 꽃이라면 국화는 가을의 꽃이다. 그러면 여름의 꽃은 무엇일까. 나는 단연 능소화를 꼽는다.

능소화는 흔한 꽃이 아니다. 이른 새벽에 피었다 해가 떠오르면 바로 문을 닫는 나팔꽃 같은 꽃도 아니고, 아침에 그렇게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해만 중천에 오르면 축 늘어지는 봉선화나 채송화도 아니다. 능소화는 숨이 콱콱 막히는 불볕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당당히 문을 열고 있다. 마치 폭염의 열기를 온몸으로 빨아들이는 모양새다. 나팔 모양의 주황빛 꽃잎을 부드럽게 펼치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관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은밀하고 은은한 가야금 선율이 흘러나올 것 같다.

능소화는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한자로 오를 능(凌), 하늘 소(霄), 꽃 화(花)로 글자대로 직역하면 '하늘을 오르는 꽃'이 된다. 실제로 장맛비가 씻어낸 맑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오롯이 피는 주황빛 능소화는 정말 하늘을 타고 오르는 모양새를 선사한다. 누가 이름을 지어도 참 잘 지었다.

능소화는 조선시대에는 상류층, 특히 양반가에서 주로 심었다고 한다. 담장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고개를 내밀 듯 피어나는 모습은 마치 안으로는 단아하고 겉으로는 품격을 드러내는 귀부인을 연상케 한다고 여겨졌다. 이런 이미지로 능소화는 여성의 절제와 정숙, 은은한 아름다움을 상징하기도 했다.

가지마다 중간중간에 무성한 털을 달고 있는 흡착판을 내어 무엇이든 한 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고 뻗어나가는 강인한 생명력이 있어 자식의 출세와 집안의 번창을 기원하는 대변하는 의미로 심기도 했다.

이래서 능소화는 귀한 집안의 상징이 되어 조선시대 양반가나 사대부 집안의 기품 있는 정원수로 자리 잡아 궁궐, 대갓집, 서원, 관청 등에 많이 심었다고 한다. 또 임금을 사모하다 죽은 궁녀의 혼이 꽃으로 피었다는 궁중 전설도 있다. 이러한 문화가 지배하였으니 일반 상민이 능소화를 심는 건 신분을 넘보는 불손한 일로 여겨졌다. 꽃조차 독점하는 계급의식의 민낯을 보는 듯 씁쓸하다.

민주화된 오늘날에 꽃은 누구라도 심고 가꾸어 감상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수년 전에 원두막 기둥을 대목으로 해서 능소화 묘목 하나를 심었는데 지금은 능소화 잎이 원두막 전면과 지붕을 다 덮고 있다. 처음 심을 때 꿈은 담쟁이덩굴이 벽을 감싸듯 원두막을 푸른 잎으로 감싸 붉게 피어나는 능소화를 보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이제 그 꿈이 이루어진 것 같다. 올해는 특이하게도 공중에서 한번 흐드러지게 능소화 꽃밭을 이루더니 더 이상 꽃이 피지 않다가 신기하게도 장마가 한 번 가고 지속되는 폭염 속에 능소화가 다시 맹렬한 기세로 피어났다. 한 번으로는 성이 안 차서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것인가.

가을처럼 푸르고 맑은 하늘을 향해 달리는 능소화, 그 붉음으로 물든 지붕을 보노라면 내가 귀부인의 영접을 받는 듯하다. 아니 그보다도 그 고요한 자태로 태양을 대적하듯 맹렬히 하늘을 향해 타오르는 불꽃 속으로 빨려드는 착각 아닌 착각에 빠진다.

꽃 한 송이의 꿈이 내게로 다가온 걸까. 거짓 없는 자연에 감사와 존경심이 절로 파도처럼 인다. 종착역으로 쉼 없이 달려가는 인생 열차를 타고 파란 하늘에 흐드러진 저 붉은 생명을 감탄하면서 나는 창문에 어리는 능소화를 자꾸만 바라본다. 열심히 드나드는 벌 나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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