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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일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속이 시원하다. 처음엔 좀 허전한 듯하더니 보면 볼수록 홀가분하다. 가지와 가지 사이 비워낸 공간으로 햇빛과 바람이 들고나는 길이 생겼다. 이제야 벤자민도 편하게 숨을 쉴 것 같다.

벤자민이 우리 집에 온 지는 아마 십 년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어느 봄 장날 노점에서 3천 원을 주고 어린나무를 사 왔다. 이파리 무늬가 예뻐 일 년 내내 꽃 보는 기분일 것 같았다. 벤자민이라는 그 이름도 좋았다.

잎이 볼수록 신기했다. 가운데 부분은 진한 초록색이고 바깥쪽으로는 크림색인데 그 경계와 비율이 조화로웠다. 마치 안목 있는 예술가가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한 작품처럼 예술적이었다. 잎사귀마다 똑같은 무늬가 없을뿐더러 제각각 다 예뻤다. 하나하나 비교하면서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갈 때가 많았다.

하지만 나의 보살핌에 비해 벤자민은 더디게 자랐다. 해가 바뀌어도 처음 우리 집에 올 때 그대로였다. 나의 관심과 사랑은 서서히 다른 화초들로 옮겨 가기 시작했고, 벤자민은 베란다 구석으로 밀려 잊힌 듯 있었다.

작년 봄 화분을 정리하다가 깜짝 놀랐다. 벤자민이 성큼 자라 있었기 때문이다. 한 뼘 남짓이었던 키가 내 허리께까지 컸다. 잎도 가지도 무성해졌다. 천천히 자라서 표시가 안 났다고 쳐도 이렇게 크도록 까맣게 몰랐다는 게 신기했을 정도다. 눈길도 받지 못한 채 후미진 구석에서 저 혼자 컸을 벤자민이 대견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얼른 큰 화분으로 분갈이를 해주었다. 거실 TV 옆 눈에 잘 보이는 데로 자리도 옮겨주었다. 다시 나의 벤자민이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근래 들어 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파리의 무늬와 빛깔이 누렇게 마르고 바람만 스쳐도 우수수 떨어졌다. 혹시 병인가 싶어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다. 추운 걸 싫어해서 갑자기 저온에 노출되면 입을 떨군다고 나와 있다. 햇빛이 적고 통기가 안 되어도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한다. 올봄 기온 변화가 심하더니 날씨가 영향을 주었나 보다.

가지치기를 해주기로 했다. 무성한 이파리 안쪽으로 살펴보니 잔가지들이 어지럽다. 우선 안쪽의 잔가지들을 다 잘라냈다. 수형이 어느 정도 잡힐 때까지는 조금 굵은 가지들도 과감히 잘라냈다. 어떤 가지를 쳐내고 어떤 가지는 남겨야 할지 고민이 길어질 때쯤 얼추 가지치기를 마무리했다. 긴 머리를 짧게 잘랐을 때처럼 훤하고 홀가분해 보였다. 소담스러운 맛은 없어졌지만 대신 분위기가 한결 여유로워졌다. 바람 잘 통하고 볕이 잘 드는 베란다 창가에 자리를 잡아주었다. 이제부터는 몸통이 더 굵어질 것이다.

몇 년 전의 내 모습이 저랬으려나. 아이들이 독립한 뒤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보던 때가 있었다. 글쓰기를 필두로 악기 배우기, 그림 그리기, 서예, 운동 등 호기심이 이는 건 뭐든 일단 시작했다. 그때는 신기하게도 배우는 것들이 다 재미있고, 다 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어느 하나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있다. 주말 빼고는 매일 배우는 게 있었으니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 몸에는 피로가 쌓이고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정신없이 일에 끌려가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었다. 우선순위를 정해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했다. 끊지 못해서 하는 일들부터 가지치기했다. 최우선순위를 제외하고는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것들도 과감하게 쳐냈다. 그제야 비로소 숨통이 트이고 제대로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벤자민처럼 말이다.

어디서 들었는데 벤자민나무에도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다고 한다. 나의 벤자민도 언젠가는 꽃 피우고 열매를 맺겠지? 그날이 오면 나도 꽃 피울 수 있을까? 그때까지 우리 둘 다 부지런히 단단해져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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