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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규

시인·화가

봄이라고 하지만 아직 찬바람 불고 오늘은 눈까지 내려 중부에는 꽃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삼월이 되면서 동네 인근에서만 맴돌다 큰맘 먹고 광양 매화마을에 다녀왔다. 예전에는 하루 여행으로 꿈도 못 꾸는 거리였지만 자동차로 장수, 남원, 구례 지나 왕복 400Km 천리 길을 당일 치기로 다녀왔는데, 아무리 교통이 발달했어도 하루 여행길은 좀 무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시국이 어수선하고 시절이 엄혹한 요즈음, 여행하기에 마음이 그리 편치 않다. 그래서 떠나기 전 망설임이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번잡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는 어디가 되었든 여행은 또 다른 활력소를 불어넣어 새로운 길을 걷는데 큰 힘이 된다.

여러 가지 일정으로 몇 년째 가지 못하던 길이었는데, 퇴직 후 요즘에는 주중 여행이 가능해, 아침에 일찍, 일사천리로 진행한 여행이었다. 영동에서 출발해 3시간여 만에 섬진강 봄의 물결과 매화가 눈에 들어왔다. 담채(淡彩)의 진경산수(眞景山水),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아마도 여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가는 길, 오는 길 푸른 강물과 산수유와 매화로 꿈의 화원을 걷는 듯 오랜만에 맛보는 향기로운 길이었다.
클릭하면 확대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광양 매화마을.

ⓒ 양선규
겨우네 매화만 그렸다 / 입동부터 동지 지나 우수 때까지 / 나무 밑동을 그리고 / 하늘로 향한 가지를 그렸다 / 매화 꽃 봉오리 그리고 / 연분홍 꽃잎을 그려 넣었다

강물도 언다는 소한 대한을 넘어 / 설이 지나고 입춘이 지났다 / 아침에는 나뭇가지에 물오르고 / 탱탱한 꽃 봉오리 맺히더니 / 꽃잎이 슬쩍 봄의 문을 열고 / 몽실몽실 하늘을 연다

겨우네 매화를 그리던 붓의 끝도 / 따스한 온기가 흐른다

<2022,《시에》봄호,「매화를 그리다」전문

섬진강의 매화 마을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규모가 큰 매실 단지로 유명한 농장이다. 봄이면 누구나 한 번쯤 다녀오고 싶으나 바쁜 직장 일로 절정의 매화꽃 피는 시기를 맞추기가 쉽지 않고 주말에는 매화마을 진입로가 차로 막혀 눈앞에 매화를 두고도 그냥 돌아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매화는 품격이 선비의 기개를 닮았다고 해서 예로부터 사군자 중 으뜸으로 쳤다. 눈 속에서도 피는 고결한 마음과 맑은 마음의 상징이어서 누구나 좋아하는 꽃이다. 아마도 잎이 나오기 전에 꽃이 피어서 사군자를 칠 때 간결한 표현을 하기에 적절하여 문인 화가들이 즐겨 그렸을 것이다.

걷는 길마다 반겨주는 청매, 백매, 홍매화로 오랜만에 눈시울 뜨거운 매화를 만났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한 번 피었다 열흘도 못 가는 꽃이지만 잠시나마 겨우네 움츠려 들었던 마음에 매화 향기 진하게 스며들었다.

예년에 비해 꽃 소식이 늦다. 하지만 요즘,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리는 봄의 시샘도 지났으니 이제 봄기운이 가파르게 올라가 여기저기에서 움트는 봄의 새싹들과 꽃들이 남해에서 서서히 북상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봄은 우리에게 주저하지 않고 설렘과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데, 큰 힘을 보탠다.

어두워야 보이는 길이 있다. 밤이 되어야 더욱더 빛이 나는 별이 있다. 지금 벼랑에 선 사람들, 답답하고 길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봄의 기운이 충만하고 매화 향기 그윽해 집집마다 사람마다 새로운 길, 밝고 환한 길 열어 주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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