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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애

수필가

오랜만에 잉크병을 열어본다. 아끼던 만년필 카트리지에 잉크를 채우고 이면지에 시험 삼아 글씨를 써본다. 그런데 종이 긁는 소리만 사각거릴 뿐 글자가 드러나지 않는다. 만년필을 흔들어 보기도 하고 젖은 휴지에 잠시 펜촉을 올려놓아 본다. 한참 실랑이하다 부드럽게 선을 그리며 검은 글씨가 풀려나오니 순간 마음이 놓인다. 새해가 시작된 지 한 주가 지났는데도 책상 위에는 새 다이어리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그대로 놓여있다. 여러 가지로 어수선하니 사실 의욕이 생기지도 않는다. 그래도 다시 시작해야겠지. 비닐을 벗기고 다이어리 첫 장을 연다. 비어있는 공백 오른쪽 끝에 멋을 부려 이름을 적어보는데 이면지에서는 매끄럽게 곡선을 그리던 펜이 잉크를 머금은 채 다시 침묵한다. 펜촉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새 마음으로 정성스레 이름을 쓰며 한 해를 열어보려던 의지는 어디로 가고 온통 신경은 만년필에 가 머문다. 결국 마음에 들지 않아 펜촉을 나무 펜대에 끼워 잉크를 찍는다. 한 자 한 자 마음을 다스리며 그림 그리듯 이름을 쓰고는 마르기 전에 글자를 스쳐 결국 이름이 뭉그러졌다. 무언가 의미를 두려 했다 의지가 한풀 꺾인 채 만년필을 탓한다. 문득 조선 문장의 사대가 중 한 분인 계곡谿谷선생의 <필설筆說>이 떠오른다.

옛날에는 족제비 털로 만든 '황모필'을 최고로 쳤다. 계곡의 친구 이생李生이 글쓰기를 좋아하였는데 어떤 사람에게 부탁하여 황모필을 얻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붓을 살펴보니 속은 개의 터럭으로 채우고 겉을 족제비 털로 살짝 입혀 놓은 것이었다. 이에 탄식하고는 계곡에게 붓을 만든 사람이 재주는 뛰어나나 참으로 간악한 상술을 가졌으니 사람이 어찌 이리 야박할 수 있냐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계곡의 답이 명언이다.

'오늘날 사대부 중에 이 붓과 비슷하지 않은 사람 찾아보기 힘들다고. 몸은 의관으로 감싸고 그럴싸한 언어를 구사하며 얼굴색도 근엄하게 꾸며 군자 같지만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이해관계가 걸린 상황을 만나면 욕심을 부리고 불의한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꼬집는다. 그런데 계곡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다. 대체로 뛰어난 듯 번드르르하게 외양을 꾸몄지만 그 속은 온통 개의 털로 채워져 있는 것이 이 붓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그들을 살피는 사람들이 제대로 눈여겨보지 않은 채 외양만 보고서 속마음까지 믿어 버리기 때문에 간사한 사람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어도 뉘우쳐 바꾸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자네가 이런 점은 걱정하지 않고 붓에 대해서만 괴이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 역시 유추(類推)할 줄을 모른다'고 친구마저 꼬집는다.

평소 만년필 관리도 안 해 두고는 공연히 새 다이어리를 핑계로 겉멋을 부리려다 마음대로 안되니 펜 탓을 하고 있는 부끄러움에 혼자 얼굴이 붉어진다. 형식이나 의식이 뭐 그리 중요한가 싶지만 갈대 솜보다 더 가벼운 나는 새해를 구실로 다잡아놓은 의지가 물러지기 전에 다이어리에라도 그리 새겨두고 싶었나보다. 쓰던 만년필을 해체해 청소하고 다시 잉크를 넣는다. '전체가 족제비 털은 못되더라도 안팎은 다르지 말아야지' 의지를 벼리며 다이어리에 다시 이름을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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