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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애

수필가

함박눈이다. 밀린 리포트에 갇혀 허둥대는 사이 어느새 12월도 저물어 가고 창밖에는 눈이 풀풀 날린다. 연무 속 흐릿하게 잠긴 도시를 배경으로 눈송이들의 난무가 산란하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버들 솜처럼 부드러운 눈송이들은 뱅그르 돌다 흐린 하늘 속으로 사라진다. 어떤 것은 창을 뚫을 듯한 기세로 달려오다 갑자기 수직으로 상승하고 더러 속도를 이기지 못한 눈송이들은 유리창에 와 부서진다. 순간 순간 미세하나 장렬한 단음들이 리듬처럼 이어지는 소멸의 소리는 투명한 경계를 건너 가슴으로 스민다. 흩어진 눈송이의 잔해들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듯 마음으로 젖어들며 복잡한 무늬를 그린다.

눈송이들에 마음을 빼앗긴 사이 진척 없는 문장 끝에서 깜박거리던 커서는 어디로 가고 노트북 화면은 어둠 속에 잠겨있다. 책상 위에는 프린트된 논문들과 빌려놓고 읽지 못한 책들, 필름 인덱스가 알록달록 붙어 있는 책들, 오래된 연극 포스터와 티켓들, 버스표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지나간 시간들이 정리되지 못한 채 실타래처럼 엉켜 심란하다.

문득 엊그제 본 영화 <행복한 남자> 덴마크의 소설가 헨리크 폰토피단의 소설 'Lykke-Per'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 늘 설계도와 풍차를 만드는 자재들로 어질러져 있던 시데니우스의 테이블이 떠오른다. 천재 공학도로 오로지 목표만 보고 불도저처럼 나아가던 그에게는 사랑조차도 이용 대상이었다. 사회적 관계에도 서툴고 이기적이며 타협을 몰랐던 그는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순간에도 고집대로 행동하다 평생 꿈이었던 프로젝트조차 물거품으로 만든다. 보편적인 시각으로 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고약하고 거친 사람이며 답답해서 속 터지게 만드는 캐릭터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제목대로 그는 행복한 남자다. 자신의 프로젝트에 이름을 얹어 무임 승차하려는 고위 관리의 제안에 당당하게 거부할 수 있는 자존심을 지녔고 그 관료에게 한 번만 사과하라는 청을 거절하여 모든 것을 잃는 쪽을 선택한 무모함과 오만함을 지녔다. 삶의 마지막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시골 허름한 오두막에서 고독하고 외롭게 살아가지만 그런 그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여인도 있다. 온몸으로 현실과 부딪히며 겪어낸 고통 덕에 자신을 얽매고 있던 종교로부터도 관계로부터도 해방되어 자신만의 고독과 마주 설 수 있었다. 거친 자연 앞에 서 있는 그의 뒷모습에서 고독하지만 의지의 강한 힘이 느껴진다.

내 의지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세상이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원칙들과 타협하며 이익을 추구하고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서 마음이 불편해도 고개 숙여 자신의 가치를 포기한다.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는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고약한 세상을 만든다. 그 선택의 경계에서 늘 애쓰는 삶이 가끔은 고단하다.

달랑 한 장을 남겨두고 있는 달력 사진도 12월은 설경이다. 사물의 경계를 지워 버린 그 흰 위로 검은 길이 구불구불 넘어가고 있다. 그 길을 따라 능선을 넘어가면 저만치 고요로 꽉 차 있는 설원에 길을 만들며 묵묵히 걷고 있을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듯하다. 흐릿한 도시, 눈발은 점점 거세지는데 길만은 또렷하게 흘러가고 있다. 문득 생각한다. 나는 나의 길을 내며 걷고 있는가. 그 길에서 난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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