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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규

시인·화가

우리나라 절기에 소설(小雪)과 대설(大雪)이 있다. 소설은 입동과 대설 사이에 있으며 눈이 적게 내리는 날이라는 뜻으로 11월 22일이며 대설은 12월 7일인데, 이날 눈이 눈이 많이 내리면 다음 해 풍년이 들고 포근한 겨울을 난다고 전해진다.

금년에는 12월이 오기 전, 지난 늦가을에 일찌감치 첫눈이 내렸다. 어른이 되었어도 마찬가지지만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에는 겨울이 오면 첫눈을 기다린 적이 많았다. 아마도 첫눈을 기다리던 그 마음은 순결의 하얀 눈을 밟고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다양한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냥 눈이 아니라 마음의 어두움을 덜어내고 지나간 시름을 잊고 하얀 눈에 묻혀 겨울을 보내는 기대 심리가 어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하얀 눈 속에 파묻혀 기나긴 겨울을 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은 하얀 빛으로 가득해 선한 마음이 자리할 것이라는 믿음은 헛된 생각일까.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익히 들어서 아는 이야기겠지만 회사후소(繪事後素)란 말이 있다. 하얀 바탕이 있어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말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 속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뜻이 포함되어 있다. 좋은 그림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하얀 순결의 빛처럼 마음을 텅 비워야 하는 그런 뜻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논어(論語)에 보면 겉으로 꾸며진 아름다움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의 '회사후소'라는 구절이 나온다. 아무리 좋은 붓을 가지고 있고 그림 실력이 빼어나다 하더라도 하얀 바탕의 종이가 없으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이치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예쁜 얼굴과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더라도 내면이 아름답지 않으면 빛이 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뜻이다. 말하자면 어진 본성인 인(仁)을 먼저 닦고 길러야 함을 공자가 후세 사람들에게 지적한 말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다 더 아름답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본성이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한시도 회사후소의 깊은 뜻과 정신을 잊지 말고 사람의 본질인 인(仁)에 보다 더 충실해야겠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사자성어가 있다. 이 말은 뽕나무 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으로 세상일이 덧없이 크게 변하였음을 비유한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겠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되었을 만큼 변해도 너무나도 많이 변했다.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보아왔던 모든 관습과 풍속, 우리가 바라본 강과 바다, 인심의 물결과 우리가 걸어 다니던 길, 더는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지고 있다.

어쩌겠는가. 세상은 더 많은 변화를 바라고 있고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꿈꾸고 있으니 세상이 변하고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변화가 사람의 본질인 인(仁)에 바탕을 두고 변화하고 발전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다. 하얀 겨울이다. 회사후소(繪事後素), 눈처럼 하얀 종이 위에 우리들의 꿈과 희망, 하나하나 다시 그려나가는 겨울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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