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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애

수필가

문득 낯설 때가 있다. 늦은 밤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가로등 불빛 속 고요한 거리가 가끔 생경하다. 가까운 사람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익숙하고 친근한 관계인데 예전에 보지 못했던 면모를 발견할 때 그렇다. 그 낯섦의 종류는 여러 감정들을 불러오는데 석연치 않은 불편함이 느껴질 때는 지나간 나의 언행을 되감기 해본다. 수면아래 잠자고 있던 나의 감정이나 고민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잘 읽히기도 한다. 더러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내게는 성찰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상대의 마음을 보려하지 않고 내 입장만 고집하다 보면 허물 수 없는 벽이 생기고 다정한 사이도 설면설면한 관계가 되어버린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두 주인공 '파우릭'과 '콜름'의 관계가 그렇다. 아일랜드의 작은 섬마을이 배경인데 아일랜드하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 아름다운 풍광과 독립투쟁. <이니셰린의 밴시> 역시 두 가지 요소를 모두 담은 작품이다. 많은 함의들을 지닌 영화지만 두 주인공 파우릭과 콜름의 관계 변화만을 단편적으로 살펴보면 요즘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중년인 파우릭과 노년인 콜룸은 날마다 함께 주점에 가서 술을 마시고 일상에 대한 수다를 나누며 지내던 이웃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 습관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콜룸이 파우릭에게 절교를 선언한다. 특별한 이유도 없다. '이제 자네가 싫어졌어' 차가운 콜름의 말을 파우릭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콜름은 어느 날 문득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일상에 대한 수다로 흘려버린 시간들이 허무했다. 삶의 가치를 찾고, 연주곡을 작곡해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런데 눈치 없는 파우릭이 자꾸 방해를 한다. 일상적인 다정한 수다가 행복이라 믿는 파우릭은 이유를 묻기 위해 콜름의 주변을 서성거리며 귀찮게 한다. 콜름은 급기야 파우릭이 찾아올 때마다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선언하지만 파우릭은 믿지 않는다. 결국 그들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주변 사람들은 방관자로 지켜만 보다 마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다정하고 평온한 삶을 추구하는 파우릭도 갑자기 실존에 대한 고민에 빠져 삶에 가치를 찾고자 하는 콜름도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공감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 이기적이었다. 자기 입장에서 자기 얘기만 하느라 상대의 마음을 살피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걸 잃고 주변마저 불행에 빠뜨린다. 요즘 보이는 풍경도 그렇다. 상대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상처가 되든 말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만 즉흥적으로 쏟아낸다. 타인을 무시하고 갈등이 생기면 화해보다 정적이 되어 돌아선다. 한줌의 평온을 원하는 희망은 닫힌 귀에 그저 길을 잃고 주변은 점점 방관자가 되어간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일까. 무엇이 역사에 의미로 남을까. 섬사람들의 불행이 무색하게 평온하고 아름답던 이니셰린의 풍경이 쓸쓸하게 떠오른다. 귀를 열어보지만 고민이 깊어지는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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