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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소월문학관 이사장

『동의보감(東醫寶鑑)』으로 유명한 조선조의 명의 허준(許浚)은 평시 고관대작의 집에 왕진 가지 않기로 유명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벼슬이나 한답시고 의원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오라, 가라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관대작들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허준은 이런 왕진 요청이 올 때마다 자신이 각기병으로 걸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대곤 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허준도 임금의 행렬을 따라 의주를 향해 급히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것을 본 이덕무(李德懋)라는 사람이 허준을 향해 한마디 던졌다. "대감, 각기병에는 그 어떤 약보다도 난리탕이 최고인가 봅니다."

다급해졌을 때의 허준의 행동을 보고 비꼬아 한 말이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다급해지면 분발하게 되는 속성이 있다. 또 따습고 배부른 때에는 하기 싫거나 하지 못했던 일들도 사정이 다급해지면 거뜬히 해내는 수도 많다.

이를테면 평소에는 힘이 약했던 어머니가 위기에 처한 자녀를 구하기 위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수가 종종 있듯이 위기적 상황은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는 전 지구적으로 엄청난 기후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미국은 사상 유래없는 북극 한파로 체감온도 영하 56도 혹한을 보내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홍수가 나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기는가 하면 끊임없는 산불의 위협과 빈번한 쓰나미 등 지구 곳곳에 재앙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거대한 문제조차 위기를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로 인류가 합심한다면 기후 위기 또한 너끈히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인간에게는 원래 실낱같은 희망만 가지고 있어도 그 한 줄기 빛을 잡고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는 강한 힘과 초인적인 능력이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속에 담겨져 있는 이런 힘과 능력을 깨닫지 못하거나 스스로 불신하며 희망과 용기를 갖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자꾸 어려운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것 같더라도 자신에게 이런 숨겨진 힘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희망과 용기를 갖는다면 그 어떤 구렁텅이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다. 인간에게는 흔히 아프면 약을 찾는 성질이 있는데,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자신의 숨겨진 힘과 능력을 찾고 희망과 용기를 갖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좋은 약이다.

궁즉통, 즉 '궁하면 통한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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