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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무명용사를 위한 추모제

진천 봉화산 전투, 북한군 남하 저지 위해 학도병 100명 희생
진천 매년 무명용사 위한 추모제로 넋 위로

  • 웹출고시간2022.06.21 15:20:48
  • 최종수정2022.06.21 15:20:48

송기섭 진천군수가 21일 잣고개 무명용사 격전지탑에서 6.25당시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진천중학생 100명의 학도병을 위로 하기 위한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이들의 애국심과 넋을 기리고 있다.

ⓒ 진천군
[충북일보] 6.25 전쟁 당시 남하하는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해 진천의 중학생 100 명이 학도병으로 진천봉화산 전투에 참여한 것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렸다.

21일 진천군은 잣고개 무명용사 격전지탑에서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이들의 국가를 사랑하는 애국심과 넋을 기렸다.

진천군지에 따르면 봉화산 전투는 6.25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의 남진이 계속되고 있었던 1950년 7월 6일부터 10일까지 진천군에서 수도사단이 최현 소장의 북한군 2사단의 남진을 지연시키기 위해 치른 지연전이다.

1950년 7월 5일 당시 수도사단은 1, 8, 18연대로 혼성 수도사단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우면서 신설된 국군 1군단에 편입되면서 수도사단으로 정식 개명돼 이준식 준장이 사단을 맡았다.

수도사단은 이날 오후 6시께 평택 동남쪽 합정리에 집결하라는 것과 진천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당시 오창리(진천남쪽 13km)에 집결한 뒤 민병권 중령의 6사단 19연대와 공동 전선을 펼치기 위해 진천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1연대는 잣고개 북쪽 진천읍에서 지연전을 전개했고, 8연대는 잣고개 동쪽 봉화산, 18연대는 잣고개 서쪽 문안산을 점령해 적들을 잣고개에서 막아냈다.

같은 달인 7월 10일 계속된 전투 속에서 방어와 반격 시도까지 성공하고 미 공군의 대대적인 공중폭격, 기총소사의 지원을 받아 국군은 사기가 올랐으나 계속된 북한군의 공세로 문안산에 이어 봉화산까지 피침당해 수도사단은 이를 두차례 탈환하려 했으나 모두 좌절되고 결국 1연대가 지키고 있는 청주 북방의 미호천 남안으로 철수해 미호천 전투와 청주 전투를 치루었다.

현재 21번 국도 잣고개에는 공원화된 전적지 시설이 있다.

당시 봉화산이 진천의 주요 격전지가 되자 진천중학생 100여명이 학도병을 지원해 전투를 벌였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학도병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전적비도 잣고개 한 켠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이에 진천군에서는 이들을 넋을 위로하고 기억하기 위해 매년 무명용사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군 관계자는 "봉화산 전투는 6.25당시 낙동강 사수에 큰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며 "진천의 중학생 100명이 학도병으로 참가해 대부분 북한군의 포격에 전사해 군에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추모제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진천 / 김병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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