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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시인

가을이 시작되는 평화로운 논둑길을 걸었다. 햇볕이 제법 따갑다. 몇 년간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마른 땅을 디딜 때마다 불에 닿은 비닐처럼 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모래가 바람을 따라 이동하는 풍경을 보며 고국의 푸르름을 그리워했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푸른 식물이 얼마나 경이롭고 고귀한 존재인지 잘 안다. 논에서는 벼가 씨알을 물고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얼마 있으면 굵은 벼가 겸손히 고개를 숙일 것이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바람 한 점에도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 '벼' 전문, 이성부

위 시는 연합을 통한 개개인의 공동체적 연대의식을 힘있게 표현한다.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이웃들에게 자신을 맡기'는 삶은 사랑과 신뢰로 하나가 된 공동체적인 삶이다. 태풍이 불거나 홍수가 오면 농부들은 벼를 함께 묶어 갈무리한다. 힘없는 벼도 함께 묶으면 꼿꼿이 서서 풍파를 견딘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은 약한 자들도 억압 속에서 더욱 강해질 수 있음을, 고통을 견디고 일어서는 힘이 있음을 나타낸다. 가을바람이 불면 익은 벼는 춤을 춘다. '춤추는 벼'는 흙과 태양과 비, 바람과 이슬이 빚은 풍작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리라. 베어진 벼는 누군가의 귀한 양식이 되기 위해 '소리 없이 떠나'고 쌀이 돼 우리의 식탁과 삶을 풍성하게 한다. '벼의 넓디넓은 사랑'은 자신을 희생해 남을 섬긴다는 의미를 지닌다. 한 줌 쌀을 얻기 위해 농부는 여름 내내 땀을 흘린다. 거기에 자연의 조화가 더해져 벼 낱알이 탄생한다. 바람이 불어와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이 땅을 지켜온 민생의 정신. 한 줌 쌀의 향기에는 자립의 '피 묻은 그리움'이 배어 있다.

독일 사회학자 퇴니에스 (Ferdinand Tonnies)는 사회 범주를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 (Gemeinschaft und Gesellschaft) 로 나눴다.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라는 개념이다. 공동사회는 가족관계에서 비롯되는 혈연, 지연 또는 종교, 문화 등 같은 동일성을 가진 하나의 집단이다. 전형적으로 농촌은 이러한 인간적인 유대감과 정서를 공유한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공동사회는 이익사회로 변이했으며 이해타산적인 사회로 바뀌었다. 현재 대부분 도시의 삶이 그러하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서로 누구인지 모르며, 얼굴을 마주쳐도 모르는 체 외면하고, 때론 층간소음으로 싸우기도 한다. 학교와 직장 역시 치열한 경쟁과 성과 위주의 고속화된 삶이 지배한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그리고 고립의 건조한 삶. 우리는 더 많은 걸 얻기 위해 아름다운 가치를 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들판에 서서 다시금 벼잎을 바라본다. 우리에게 서로 기꺼이 함께할 벼 같은 이웃이 있을까, 아니 나는 그런 이웃이 될 수 있을까. 뾰족한 잎새 끝이 내 가슴을 겨눈다. 하나로 뭉쳐 서로를 나누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넉넉한 힘과 사랑. 시인은 떠났지만, 푸른 벼잎 같은 시인의 정신은 들판을 가득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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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우 충북도체육회장, "재정 자율화 최우선 과제"

[충북일보] 윤현우 충북도체육회장은 "도체육회의 자립을 위해서는 재정자율화가 최우선 과제"라고 밝혔다. 윤 회장은 9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3년 간 민선 초대 도체육회장을 지내며 느낀 가장 시급한 일로 '재정자율화'를 꼽았다. "지난 2019년 민선 체육회장시대가 열렸음에도 그동안에는 각 사업마다 충북지사나 충북도에 예산 배정을 사정해야하는 상황이 이어져왔다"는 것이 윤 회장은 설명이다. 윤 회장이 '재정자율화'를 주창하는 이유는 충북지역 각 경기선수단의 경기력 하락을 우려해서다. 도체육회가 자체적으로 중장기 사업을 계획하고 예산을 집행할 수 없다보니 단순 행사성 예산만 도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선수단을 새로 창단한다거나 유망선수 육성을 위한 인프라 마련 등은 요원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달 울산에서 열린 103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충북은 종합순위 6위를 목표로 했지만 대구에게 자리를 내주며 7위에 그쳤다. 이같은 배경에는 체육회의 예산차이와 선수풀의 부족 등이 주요했다는 것이 윤 회장의 시각이다. 현재 충북도체육회에 한 해에 지원되는 예산은 110억 원으로, 올해 초 기준 전국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