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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시인

안개다. 희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오랜만에 고국에서 새벽 안개의 정취에 빠져든다. 안개는 희미한 자취만 남기고 숲과 건물을 조용히 가린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방향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은 불안감을 준다. 길을 가는 이는 미지에 대한 공포 속에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 흰옷 입은 유령처럼 다가와 몸을 에워싸는 안개. 안개는 슬그머니 내 머리칼을 적시고, 몸을 적시고, 발밑을 적신다. 이 신비로운 자연현상은, 보고 느끼는 이의 감정과 사상에 따라 모두 다르게 이입될 것이다. 시인들은 어떠할까. 안개를 소재로 쓴 많은 시가 있지만, 그중 한 편의 시를 소개한다.

2004년 11월 11일 오후 4시

성긴 발처럼 천천히 내리던 실비

홀연 연막 안개로 바뀌는 청주 상당산성,

시야 1미터.

방금 기어오른 성벽 위를 걷는지

성 안을 걷는지 성 밖을 걷는지

시간 전 저 아래 도시에서 강연하며 생각 증발시킨

뇌 속을 걷는지?

과거에도 이런 길 걸은 적이 있다.

한 치 세상 앞이 안 보일 때

도처에 허방이 도사리고 있는 안개 속을 걸었다.

일순에 맨땅으로 다이빙하는 아슬아슬과

아슬아슬의 내벽에서 진땀처럼 돋는 가벼움을 번갈아 맛보며

무명(無明) 속을 외길 내며 걷는 것.

어디선가 몸 뒤척이는 추억의 무적(霧笛) 소리,

짐승 같은 바위 피해 급히 몸을 돌리자

눈썹 바로 앞에서 나무 하나가 몸을 홱 틀어

간신히 충돌을 피해준다.

전신 출렁! 내가 나를 비킨다.

그만 발길 되돌려?

이런, 백자(白磁) 유약 속 길인데!

그대로 걷는다. 허방들이 촉각에서 해방된다.

안개 속이 훤하다.

-황동규, 안개 속으로 전문

청주에서 강연을 마치고 상당산성을 찾아간 시인은 그곳에서 안개를 만난다. 안개는 시 속으로 스며들어 시인의 사유와 함께 흘러간다.

삶을 살아가면서 <한 치 세상 앞이 안 보>이고, <도처에 허방이 도사리고 있는> 길을 걷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아무 일도 없이 인생을 사는 예는 없다. 태어난 순간부터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위험과 부딪치며 살아야 한다. 그 어려움에 대하여 <그만 발길 되돌려·>라고 자문하던 시인은 <백자 유약 속의 길인데!> 하는, 놀라운 성찰을 통해 현재 처한 삶을 극적인 아름다운 세계로 변화시킨다. 백자 속의 길! 즉 시인은 위험 속을 <그대로 걷는> 정공법을 택하고, 비로소 모든 <허방들이 촉각에서 해방되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환한 길을 걷는 것이다. 초탈한 듯, 흰 백자 속을 걷는 시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대만에서 일하던 시절, 저녁 시간에 오토바이를 타고 밖을 나갔다가 안개를 만난 적이 있었다. 숙소는 산 위 언덕배기였는데, 어둠과 함께 밀려온 안개는 모든 시야를 막아버렸다. 나는 오토바이에서 내려 운무에 둘러싸인 채, 망연자실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찌해야 하나. 한참을 서 있던 나는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움직이는 것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장님이 지팡이로 앞의 물체를 가늠하듯 발을 조금씩 내디디고, 바닥의 질감을 감촉으로 확인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얼마를 지나가자 안개가 엷어지고 이내 앞이 트이면서 길이 보였다. 지나고 보니 실상 안개가 뒤덮은 지역은 그리 넓은 면적은 아니었다. 골을 따라 일정 지역만 안개가 깊게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앞의 삶은 어떠한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내 안개의 정체는 무엇일까. 천천히 나아가보라. 안개의 넓이는 고작 일 미터도 채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듬어 걷다 보면 어느새 길은 환해지리라. 가만히 있으면 우리는 안개의 허구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두려워 말고 한 걸음씩 가야 한다. 흰 백자 속의 길을 걷듯 긍정적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정신의 허방에 빠지지 않고 밝은 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손으로 안개의 커튼을 옆으로 민다. 햇빛 한 줄기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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