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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시인

참 오래도록 무심천 근처에 살았다. 유년기를 무심천과 중앙공원을 놀이터로 삼아 자라왔고 청소년기도 무심천을 건너 반대편 천변에서 살아왔다. 무슨 이유인지 타지의 삶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중년의 나날을 또 무심천과 함께 보내고 있다.

폭우가 도시의 경계를 지우고 간다. 이런 날에는 무심천으로 물을 보러 간다. 얼마나 물이 찼는지 눈으로 봐야 걱정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안방까지 물이 차는 수해를 당해 본 사람은 그날의 공포를 쉬 지울 수 없을 것이다.

80년도에 우리 가족은 서원대 부근의 천변이었다. 둑의 높이와 지붕의 높이가 거의 같으니 위험을 안고 있긴 했다. 폭우로 무심천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을 보면서도 온 가족은 걱정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 물이 차리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었다. 갑자기 하수구 맨홀 뚜껑이 펑 소리를 내며 마당부터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놀라서 광에 쌓아놓은 연탄부터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부질없는 짓이었다. 순식간에 연탄은 와르르 쓰러져 내리고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를 둘러업고 근처의 학교로 대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엌에 물이 차고 솥에 담긴 밥도 꺼내지 못했는데 안방의 이불장까지 찰방찰방 물이 찼다. 광속에 숨어 살던 쥐가 헤엄쳐 안방으로 들어왔고 재래식 화장실이 넘쳐 오물이 떠다녔다. 손을 쓸 수 없이 온 가족이 망연히 서 있었다.

재해로 혼이 빠져본 사람은 장마가 오면 늘 무심천을 서성거린다. 어려서는 아버지 손을 잡고 통째로 떠내려 오는 초가지붕도 보고 헤엄치는 소와 돼지도 보고 늙은 호박이 출렁거리며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안타까워하셨다.

내가 애용하는 하상도로가 사라졌다. 무수한 풀들의 머리끝이 보이지 않는다. 안내판이 사라져 이곳에 사람이 다녔다는 흔적이 말끔히 사라졌다. 컴컴한 하늘은 보이는데 길은 없다. 바닥이 없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일보다 모든 사람은 바닥을 딛고 다니는 일이 더 많은데 바닥이 없으니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이 없다. 디뎠을 때 단단히 받쳐주는 힘이 없다.

바닥은 천함이 아니다. 바닥이 힘이다. 천지의 모든 것은 바닥의 힘으로 버티고 설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신나게 뛰고 노는 트램펄린 위에서 편안히 걷기는 어렵다. 푹신한 라텍스가 깔린 길을 몇 분이나 편히 걸을 수 있을까. 편안함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말랑말랑한 것들도 좋지만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힘이 세고 단단해야 한다.

붉은 물로 가득 차서 머리서 얼핏 보면 평평한 활주로 같은 무심천이 무섭게 보이는 것은 바닥을 삼키고 입을 싹 닦고 있는 심술 때문이다. 뼈도 없는 저 붉은 것이 언제 방향을 틀어 어느 도시 어느 가난하고 낮은 집으로 돌진할지 두렵기만 한 것이다.

하천부지의 풀들은 지금도 물속에 잠겨 숨을 참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이 빠지고 나면 그들은 한쪽으로 굽었던 허리를 펴고 젖은 머리를 털어내고 생을 이어갈 것이다. 뿌리를 좀 더 뻗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씨앗을 바람에 흩뿌려 놓을 것이다. 내년 봄에는 새순이 솟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생을 이어가겠지. 바닥은 그들의 뿌리를 온 힘으로 끌어안고 있었으니까. 그 어떤 것이 바닥을 지우고 길을 지워 방향을 잃게 해도 바닥은 자신에게 뿌리를 둔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으니까.

언제쯤, 이 지루한 장마가 끝이 날까. 이 눅눅한 공기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걸까. 집을 잃은 사람들은 언제까지 임시수용소 날바닥에서 새우잠을 자야 하는 걸까. 갈 곳은 있는 것일까.

하늘은 세상을 뒤집어버리려 요동을 치고 있지만, 바닥이 든든하면 또 견뎌내는 것이지. 잠시 길이 지워지고 바닥이 사라져도 우리는 또 길을 내고 바닥을 다지며 살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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