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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중

전 단양교육장·소설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사진을 정리하다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 둘과 필자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 속의 친구 두 명 모두가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인물이어서 감회가 새롭더군요. 한 명은 결혼 후 무슨 연유에서인지 부인과 자녀를 이끌고 미국 동부의 어느 도시로 이민을 갔고, 다른 한 명은 채 서른을 넘기지 못한 아까운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특히, 간암으로 세상을 등진 친구에게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시절, 그가 보였던 비범한 행동들 때문이랍니다.

사진을 찍었을 당시, 우리는 라디오를 통해 해외에서 중계되는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건아들이 지금 적군을 사정없이 유린하고 있습니다" 하는 유(類)의, 애국심을 충동질하는 흥분조의 스포츠 중계를 즐겨 들었는데, 그즈음에 우리의 인기를 가장 끌었던 것은 축구 경기였습니다. 우리나라 축구가 세계적인 대회에는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동남아시아에서 열리는 메르데카배 대회라든지 킹스컵 대회 정도에서 강호로서의 면모를 보이던 우물 안 개구리 시절이었습니다.

대회가 열릴 때면 친구와 필자는 각자의 집에서 라디오를 통해 중계를 들었습니다. 다음 날이면 수훈 선수라든지 한국팀의 작전에 대해 서로가 나름대로의 견해를 펼치며 공동의 화제로 삼곤 했지요. 킹스컵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태국을 2대 0쯤으로 이기고 우승을 한 이틀 후였던 것 같습니다. 집으로 한 장의 엽서가 날아들었습니다.

'친구, 잠 못 이루었지? 그러나 이제 마음 푹 놓고 달게 자게나. 이회택의 그 멋진 슛, 꼭 그림 같았지? 좋은 밤 되게나.'

경기가 끝난 지 며칠 후에 도착한, 더욱이 엽서를 받았을 당시에는 밤이 아닌 햇살이 환한 대낮이었지만, 친구의 따스함을 발견해 내고는 감격해 마지않았습니다.

그 친구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삽화가 또 하나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었을 때였지요. 이미 진학할 대학이 결정된 시기였으므로 그동안 대학 입시에 대한 정보를 서로 주고받으며 호의적으로 지냈던 넷이 서로의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할 셈으로 친구네 집에 모여 함께 밤을 지새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처음 포도주로 건배를 했습니다. 그러다 차츰 취해 가면서 소주와 맥주를 마셨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술이 약하다면서 막걸리를 한 사발 가져다 놓고는 그것을 숟가락으로 홀짝홀짝 떠먹더군요.

술을 가까이 하지 않던 우리가 엉망으로 취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자정이 지나자, 친구 하나는 앉은자리에다 제가 먹은 음식이며 술을 그대로 토해 냈고, 다른 친구 하나는 방의 구석에다 오줌을 질질 쌌습니다. 그런 추태를 친구는 중간 중간 막걸리를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웃는 얼굴로 수습했습니다.

한바탕 소란 후에 우리는 친구가 대충 펴준 잠자리에 누웠는데 친구는 계속 윗목에 웅크리고 앉은 채 숟가락으로 막걸리를 떠먹었습니다. 그 모습, 윗목에 웅크리고 앉은 채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숟가락으로 술을 떠먹는 기이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필자는 '비범한 바보'라는 어휘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비범한 바보는 그 해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습니다.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재수를 선택했던 것이지요. 이듬해 명문 대학에 진학했지만 가세가 기울어 중퇴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몇 년이 흘러 어렵게 세무공무원이 되었지만 채 서른을 넘기지 못한 채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가족마저 등쳐먹는 각박한 세상이기에 일찍 이승을 떠난 흑백사진 속의 인간적인 친구가 못내 생각나는 요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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