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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역사 속으로 사라질 판

영동 생존자 가족 이춘하 씨 강제징용 사실 찾아 어렵게 신고
정부와 일본 광복 75년 가까워오지만 진실 규명하지 못해
최근 일본경제보복 사태 힘없음 당하는 것

  • 웹출고시간2019.08.13 20:50:36
  • 최종수정2019.08.13 20:50:36
[충북일보 손근방기자]"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이 피해보상은 커 녕 진실규명조차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내년이면 광복 75주년을 맞는 가운데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일본에 강제 징용됐다 일본 군함 '우키시마호'를 타고 귀국하던 중 폭침돼 가까스로 살아 온 영동의 생존자 가족이 진실규명과 피해보상이 되지 않은 채 점차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것에 참으로 아쉽다고 밝혔다.

우키시마호 생존자 가족인 영동의 이춘하 씨가 일본은 지금이라도 강제징용 피해보상과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손근방기자
우키시마호 생존자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영동군 학산면 학산리 이건태(98) 씨 장남인 이춘하(80) 씨는 해방된 지 75년이 가까워 오지만 희생자들을 위해 지금까지 일본과 우리정부는 한 것이 하나도 없다며 강한 불만을 터뜨렸다.

이 씨는 "정부가 강제 징용사실을 신고하라고 해 근거를 찾아 어렵게 어렵게 신고했으나 지금까지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며 "일본은 희생자 유가족에게 사과와 배상을 우리정부는 진실규명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맘때만 되면 이 씨 부친은 "가족들과 함께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고생했던 젊은 시절에 대한 얘기를 나누곤 했다"며 "이젠 고인이 됐지만 당시에도 생각하기조차 싫어했다"고 했다.

올해로 사고발생 74주년인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이렇다.

광복직후인 1945년 8월 24일 2차대전 당시 비행장, 터널, 지하탄약고 등 건설을 위해 일본 아오모리현 반도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일본 군함 우키시마호(4천730t급)를 타고 귀국길에서 참변을 당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부산을 향하던 우키시마호는 갑자기 항로를 바꾼 뒤 원인 모를 폭발로 교토부근 마이즈루만 해상에서 침몰, 수천 명이 수장된다.당시 일본정부는 배가 미군 기뢰와 충돌해 한국인 승선자 3천725명 중 524명과 25명의 일본 승무원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희생자 유족과 시민단체는 실제 승선 자는 8천 여 명에 이르고 사망자도 5천 여 명에 달한다고 추정했다.이 씨 등도 이 배를 타고 귀국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영동으로 돌아온 생존자였다.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20살 때인 이 씨는 1943년 5월 영장이 나와 소집통보를 받고 영동군청에 집결해 영동병력 50여명과 함께 영동역에서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 다음날 부산항을 출발 일본으로 갔다. 영동에서 간 일행들이 도착한 곳은 아오모리현 비행장이었다. 이곳에서 주로 비행기를 위장하는 일에서부터 바닷가 굴을 파고 지하탄약고를 만드는 일에 강제노역을 혹독하게 했다.갑자기 해방이 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 씨 등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뻤다. 해방소식을 듣고 몇 일 뒤인 8월 18일 일본 해군들이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태워준다고 해 아오모리현 오미나토 항에서 탄 배가 돌아오지 못하는 비극의 귀국선이 됐다.조선인들로 가득찬 배를 타고 이틀이 지났는데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나더니 엄청나게 큰 배가 두 동강나면서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으며 배에 탔던 사람들 대부분 손 한번 못쓰고 바닷물에 휩쓸려 들어갔다. 아비규한 그 자체였다.갑판난간과 돛대에 매달려 있었던 이들은 수천 명이 죽어가는 처참하고 끔찍한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마침 구조 배에 옮겨 타고 부산항에 무사히 도착하게 된다. 이 씨 등은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참혹했던 모습이 떠올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후 이 씨 등은 보은과 영동의 생존자, 희생자 유가족들과 함께 1992년 8월 일본까지 건너가 소송 등 보상투쟁을 벌였으나 보상은 커 녕 사과한마디 듣지 못했고 1심에서 위로금 지급 등 일부 승소했지만 2심과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패소했다.내년이면 사고발생 75주년인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우리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그나마 진상규명과 보상투쟁을 벌였던 생존 자들 마저 세상을 떠나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이 씨의 장남인 이춘하 씨는 "정부가 강제징용 된 사실을 확인했으면 마땅히 보상이 이루어져야 했다"며 "신고 후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분개했다.

최근 일본의 경제보복조치에 대해 한마디 했다.

이 씨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번 기회에 본 떼를 보여줘야 한다"며 "돈 많고 힘이 강하면 일본은 우리를 절대로 얕보지 않을 것"이라고 분개했다.

그러면서 "이참에 정부 등은 강하게 밀어붙이고 국민들도 한마음이 돼 우리의 저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며 "일본과 아베정권은 과거사에 대해 사과할 것을 촉구 한다"고 밝혔다.

영동 / 손근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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