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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찬순

전 충북문인협회 회장

이완용李完用의 개념을 아주 정확하게 정리해 놓은 「한국인명대사전」에는 「민족반역자」그리고 「매국의 원흉」이라고 못 박았다. 우리는 그를 보통 매국노라 부른다. 나라를 팔아먹은 노예처럼 천한 쌍놈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태어난 나라를 흔히 조국祖國 또는 모국母國이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피와 생명을 내려준 할아버지와 직접 낳아준 어머니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신성하고 고귀한 할아버지 어머니를 팔아먹은 쌍놈이 매국노다.

그는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대원군의 친구이자 사돈인 이호준에게 입양한 우봉이씨 가문 출신으로 24세에 별시 과거 시험에 합격 하기전 부터 영어공부를 열심히 한 당시로서는 영어에 능통한 사람 열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공사 참사관으로 워싱턴에 첫 부임했고 몇 년 후에는 대리공사로 두 번째 워싱턴으로 달려갔다.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과 대화 할 때는 서로 말리 안 통해 영어로 했다한다. 이등의 추천으로 그는 훗날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 후로 그는 출세가도를 내달렸고 1895년에는 학부대신에 올랐다. 그 다음 해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주도했고 친로파가 되었다.

그러나 1901년에는 친일파로 변절하여 반역의 늪에 온몸을 내던졌다. 세 번이나 차례로 반역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 돌이킬 수 없는 매국의 원흉이 되었다.

첫 대문은 1905년 그러니까 을사년乙巳年 11월 17일 학부대신으로 앞장서 을사조약을 체결시켜 을사오적五賊(이완용 등)이 되고, 두 번째 문은 1907년 정미년丁未年 7월 17일에도 참정대신 이완용이 또 앞장서서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맺게 한 정미 7적으로도 이름을 올린 것 세 번째 문은 1910년 경술년庚戌年 8월 29일 한일합방 조약을 총리대신 이완용이 주도하여 강압적으로 조인 시킨 경술9적으로 악명을 떨친 것이었다.

을사조약은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정미조약은 통감부를 설치하여 통치권을 장악했으며 한일합방 조약은 「한국 황제는 한국전체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일본 황제에 양여함」이 그 내용의 골자로 나라 전체를 들어 바친다는 것이었다.

그 세차례에 걸쳐 매국노의 수는 21명 그러니까 21적二十一賊이었다. 그 가운데도 두 번이나 그 일에 손을 댄 자는 이완용과 박제순이었고 또 그중에서 이완용은 유일하게 그 세 차례의 매국 행위에 세 번 다 몸을 던져 영혼까지 팔며 진실로 더러운 민족 반역자 매국의 원흉이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실제 사람 수는 18적인 셈이었다. 그로인해 그는 백작이란 최고의 작위를 받고 은사공채로 15만엔(30억)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합방 후 고종과 순종에게 준 최고 훈장 국화대수장을 이완용에게 내렸다. 어디 그뿐인가 그가 1926년에 죽을 때 그가 끌어들인 재산은 300만엔으로 조선 귀족 중 두 번째(첫번째는 민영휘)의 거부였다. 죽을 때까지 매국노의 길을 걸으면서 막대한 재산을 손에 넣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의 한 지식인이 말했다. 「이완용 같은 매국노가 편안하게 죽는다(와신종석臥身終席)는 것은 조선의 수치다」라고. 참으로 명언이었다.

그는 죽고 나서 전국에 열두개의 크나큰 무덤을 만들었다. 우리 고장 옛 문의초등학교 뒷산에도 이완용 무덤이 있었다. 그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매국노의 무덤이 파헤쳐져 부관참시될 것을 두려워 한 때문이었다. 조조 같은 꾀를 내어 한 반세기 가까이 무사했으나 어느날 갑자기 전국에 산재한 그 열두개의 무덤이 모조리 처참하게 파헤쳐졌다. 문의초등학교 뒷산 무덤도.

그 시체는 전북 익산 생전에 그가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손에 넣은 곳에서 나왔다는데 무참하게 냇가에 뿌려졌다한다 부관참시된 것이었다. 그의 증손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며 모두 파헤쳐 놓았다 한다. 매국노의 후손이라는 많은 비난을 받은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아마도 그것은 역사의 칼이 엄격하게 그를 내리친 응징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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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