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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은영

충북도 바이오정책과장

학창시절 나의 이름은 항상 '맹'이었다. 친구들은 당연하고 선생님들까지도 "맹!"이었다. 아니면 '맹구', '맹꽁이' 등 내 유별난 성 때문에 붙여진 별명들이 '은영'이라는 이름보다 익숙했다. '은영'이라는 이름은 내 나이 또래에서는 너무 흔해서인지 초등학교 시절에는 '큰' 김은영, '작은' 김은영, 박은영 등 '은영'이라는 이름이 같은 반에 5명까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일수록 나의 성은 더 큰 위력을 발휘했고, 나에게서 '은영'이라는 이름은 점점 사라져갔다. 누군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에서겠지만 "은영아"라고 부르면 오히려 당황해서 뒷걸음친 적도 있다.

이런 경험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우리 세자매가 성안길 한복판을 걸을 때에도 어디선가 "맹!"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 셋 모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네 친구냐 내 친구냐 찾느라 분주했다. 엄마는 어디 가서 나쁜 짓을 하면 너희는 성 때문에 바로 누구인지 티가 나니 항상 행동 조심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그 때문에 우리 모두 타고난 소심함에 후천적 소심함까지 더해져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누가 갑자기 "맹!"이라고 부를까봐.

집에서도 애칭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별명들을 부르며 지내던 터라 '은영'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것은 거의 일상이었다. 그러던 중 언니가 결혼을 하고 조카가 태어났다. 그 순간부터 언니의 호칭은 '범수엄마'로, 나는 '큰이모' 동생은 '막내이모'가 되어 있었다. 이상하게 언니네 식구들이 없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직장에서도 들을 수 없는 나의 이름 '은영'이는 서명을 하거나 식당 예약을 할 때 내가 직접 적고 부르지 않으면 튀어나올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름하여 '이름 실종사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나보다 더 오랜 시간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더라. 바로 우리 엄마, 지재숙 여사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 김춘수의 시 <꽃>이나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한 대목의 <홍길동전>이 웬 말이냐. 멀쩡한 이름이 있지만 그녀는 엄마, 여보, 외할머니, 막내야(우리 엄마는 6남매 중 막내딸이다)라는 호칭이 일상이다. 하루 중 우리 엄마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사람은 아마도 포인트 적립을 확인하는 슈퍼마켓 계산원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급 서글퍼진다.

예전에 본 기사 중 '내 나이 때 엄마를 만나면 해주고 싶은 말'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가 있었다. 상위권을 차지한 대답은 '아빠랑 결혼하지 마', '가족에게 헌신하지 말고 엄마 인생 살아', '날 낳지 말아달라' 등이었는데, 결국 대부분의 대답이 엄마가 '엄마'로서의 삶보다는 본인 자신을 위해 즐기며 살기를 바라는 내용이었다. 한참 인기 절정이었던 드라마 'SKY캐슬' 중 '한서진'이 예서엄마라는 이름에 올인하면서 보인 그 삐뚤어진 용기를 '곽미향'이라는 본인에게 쏟아 자신있게 살았더라면 그녀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명절 연휴 식충이가 되어버린 식구들에게 삼시 세끼를 해먹이며 제사 준비까지 하느라 종일 고된 노동을 이어가면서도 예전 산골짜기 추운 시골집에서 나무로 불을 지펴가며 매번 동네잔치 벌이듯 하던 거에 비하면 요즘은 소꿉장난 같다는 우리 '지재숙 여사'의 농담이 웃음으로만 넘기기에는 마음이 짠하다. 집에서는 일안하기로 소문났던 과수원집 막내딸 재숙이가 아내 노릇, 엄마 노릇, 맏며느리 노릇으로 이렇게 달라진 모습에 하늘에 계신 우리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우리 재숙이 잘한다며 흐뭇한 미소로 보실지라도 말이다.

새해가 시작되었다. (음력 설이 되어야 진정한 새해가 되었다고 믿는다. 작심삼일을 후회하지만 만회할 기회를 얻었으니.) 우리 엄마 지재숙 여사의 새해도 시작되었다. 올해는 아내, 엄마, 며느리가 아닌 지재숙 여사의 독자적인 역사를 새로 쓰는 시간이 조금씩이라도 생겼으면 좋겠다. 엄마의 새로운 도전은 얼마든지 우리가 응원할테니 말이다.

누구에게는 짧았고 또 누구에게는 길었던 설연휴가 끝났다. 이제야 한숨 돌리며 허리를 펴는 모든 엄마들에게 오늘은 엄마라는 호칭 대신 이름과 함께 수줍지만 작은 손가락 하트라도 날려주는 센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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