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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8.06.23 10:12:38
  • 최종수정2018.06.23 10:12:51
ⓒ 뉴스1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92세.

김 전 총리는 지난 23일 오전 급격히 병세가 악화돼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순천항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끝내 눈을 감았다.

김 전 총리는 이미 병원 도착 전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사인은 노환으로 전해졌다.

김 전 총리의 빈소는 현대 아산병원에 차려지며 5일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발인은 27일 수요일. 노제를 지낸 뒤 장지인 충남 부여 선산에 안장될 예정이다.

김 전 총리의 서거로 국내 현대 정치사를 이끌어왔던 이른바 '삼김(三金) 시대'의 주역들이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김 전 총리는 1926년 1월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산리에서 7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김씨로 부친은 부여군 규암면장을 지낸 김상배(金相培)옹이며 모친은 이정훈(李貞薰)여사다.

김 전 총리는 부여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5년제인 공주중학교를 4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대전사범학교를 수료했다. 1946~1848년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부(3년 수료)를 거쳐 1949년 육사 8기로 졸업했다. 육사에서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으며 박 전 대통령 소개로 배우자인 박영옥 여사를 만나 1951년 결혼했다.

김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정계에 입문해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초대 중앙정보부 부장을 지냈으며 박준규 전 국회의장·김영삼 전 대통령(YS)과 함께 9선(6·7·8·9·10·13·14·15·16)으로 역대 최다선 의원을 역임했고 11대(유신정권)와 31대(DJ정권) 두차례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61년 5.16 쿠데타를 기획하고 감행하면서다. 쿠데타 직후 김 전 총리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만들어 초대 부장을 지내면서 권력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당시 그의 나이 35세였다. 이때부터 2004년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43년간 한국 정치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처 조카로 정권 '2인자'로 올라선 김 전 총리는 그러나 1969년 '3선 개헌'을 계기로 권력의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져갔다.

박정희 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으로 1971~1975년 제11대 국무총리를 지내며 유력한 대선주자로까지 거론됐으나 '3선 개헌'과 '유신 선포'로 두번 대통령의 꿈이 좌절됐다. 이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과 서먹한 관계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후 '서울의 봄' 정국에서 김 전 총리는 김영삼 의원(신민당), 김대중 전 의원과 함께 유력한 대선주자로 다시 거론됐으나 전두환 전 대통령을 필두로 한 신군부 세력에 의해 정치 활동을 금지 당했다. 신군부는 이 과정에서 김 전 총리를 부정축재자로 지목,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그후 미국에 머물며 잠행하던 김 전 총리는 1987년 6·10 민주항쟁을 계기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 13대 대선에 대선 후보로 나섰으나 고배를 마셨다.

김 전 총리는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쳐진 거대보수여당인 민주자유당에 몸을 실었다가 김영삼 정부(YS) 정부 시절인 1995년 당내 민주계에 의해 '2선 후퇴'를 요구받으면서 탈당, 자민련(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자민련은 이듬해인 1996년 15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켜 충청권을 기반으로 무려 50석을 얻는데 성공했고 김 전 총리도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김 전 총리는 1997년 DJP(김대중, 김종필, 박태준)연합을 통해 총리에 재임하게 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이어갔지만 2001년 내각제 개헌 문제로 DJ와 결별 수순을 밟았다. 2004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17대 총선에서 참패,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김 전 총리는 2008년 말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휠체어에 의존해왔으나 2013년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회' 창립총회를 열고 2015년에는 43년의 정치인생을 펴낸 책을 출간하는 등 최근까지도 정치적 행보를 이어왔다.

'정치9단'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한국 현대 정치사에 족적이 뚜렷하지만 훗날 '제2의 을사조약'이라는 저항을 부른 1962년 '김종필-오히라 메모' 등 역사에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김진(55) 운정장학회 이사장과 김예리(65) Dyna 회장이 있다.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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