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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섭

청주시 공보관실 팀장

눈이 내린다. 지금 나는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뚫고 정북동 토성을 걷는다. 몇 달 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누런 벼들이 가을을 찬미하느라 법석 이었는데, 눈 내리는 텅 빈 들판은 모든 걸 내려놓고 길 떠나는 여승의 뒷모습처럼 쓸쓸하다. 저 멀리 보이는 소나무 한그루, 오늘도 변함없이 토성을 지키며 홀로 서있다. 추운 겨울이 되고 나서야 소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애국가 속의 소나무처럼 웅장함은 없을지언정 눈, 바람 속에서도 푸르름은 잃지 않고 있다.

토성 안을 들어서니 노부부가 성안길을 걷고 있다. 두 손을 꼭 잡고 서로 기대어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들이 살아온 연륜만큼이나 정겹다. 무슨 이야기를 저렇듯 정답게 주고받는 것일까. 하얀 눈을 맞으며 서있는 소나무가 가끔씩 내비치는 햇살에 반사되어 더욱 푸르름의 빛을 발하고 있다. 정송오죽(淨松汚竹), 깨끗한 곳에서는 소나무의 기상이, 오염된 곳에서는 대나무의 절개가 빛난다고 했던가. 옛날 선비들은 의리와 절조(節操)를 미덕으로 삼았다. 그래서 소나무를 좋아했다. 늘 변함없는 소나무의 기상으로 재야(在野)에서는 청빈(淸貧)하게 살았고,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청백(淸白)을 몸소 실천하면서 살았다. 각루(角樓)에 올라서서 눈을 맞고 서있는 소나무를 바라보니 문득 세한도(歲寒圖)의 노송 한그루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추사(秋史)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다섯 번째 맞는 그 해 겨울날, 찾는 이 없고 세상에서 잊혀 질것 같은 두려움의 시간들이 무심했을 것이다. 유배된 학자로서 무엇보다 힘든 것은 책을 마음껏 볼 수 없는 괴로움이었으리. 이때, 역관 출신으로 중국에 드나들던 제자 이상적으로부터 귀한 책이 배달되었다. 이 고마움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추사는 붓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새삼 깨닫게 된 제자의 따뜻한 마음을 세한도에 촘촘히 그려 넣었다. 추운겨울 텅 빈 공간에 쓸쓸히 자리 잡은 초라한 누옥, 쓰러질듯 외롭게 서있는 노송 한그루, 그리고 잣나무 세 그루. 어쩌면 노송은 북풍한설(北風寒雪) 몰아쳐도 변함없이 푸르른 소나무처럼, 혼탁한 세상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고 꼿꼿한 선비정신을 지키고자 했던 추사 자신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그림을 받아든 이상적은 스승의 세심한 마음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장무상망(長毋相忘), '스승의 가르침을 오래도록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글을 세한도 한 구석에 깊숙이 새겨 놓았다. 먹물보다 진한 사제(師弟)의 정이 가슴에 여민다.

오늘날 바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선비정신은 낯설기만 하다. 시대를 뛰어넘어 세한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힘든 시절에 스승과 제자가 나눴던 변치 않는 의리와 사랑 때문이다.
의리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할 도리이다. 어떤 배우처럼 두 주먹 불끈 쥐고 말로만 외쳐서 되는 일이 아니다. 나에게 도움 줄 수 있는 사람을 쫒아 줄을 서고 서약을 맹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푸른 소나무와 같이 당당함을 잃지 않고, 스스로를 곧추세워 섬세하게 상대방을 헤아리는 것. 그리고 편견 없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런 인품이야 말로 오늘날 우리가 지녀야 할 참된 품성이 아닐 런지. 그 옛날 선조들이 사대부가 지녀야 할 덕목 중의 하나로 의리를 꼽았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많은 관계 속에서 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믿음과 신뢰다. 선조들이 소나무의 푸르름과 의연한 자태에서 삶의 지혜를 배웠듯이, 나도 순간순간 닥쳐오는 모든 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나의 길을 걸어가야겠다.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서있는 저 소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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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