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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예

수필가

느닷없이 아파트 입구 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택배 일 리도 없고 연락 없이 자식들이 올 리도 만무한데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남편의 지인이었다. 주황빛 감 한 바구니를 불쑥 내밀고는 남은 감을 마저 따야 한다며 그길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가버렸다. 가을 들판처럼 황금빛으로 가득 찬 소쿠리의 위쪽에는 홍시들이 조심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터질세라 이리 저리 옮겼을 지인의 다정하고 섬세한 손길이 느껴졌다.

진홍색의 말간 홍시를 보니,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얼른 홍시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나무에서 익은 홍시는 역시 맛이 달랐다.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과즙이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려 미처 껍질도 벗기지 못하고 그냥 쪽쪽 빨아 먹었다. 순식간에 홍시 세 개를 해치웠다. 그만 배가 불룩해졌다.

바로 먹을 홍시를 골라내고 남은 땡감은 물러진 것과 단단한 것으로 구분하여 종이 상자에 차곡차곡 담았다. 홍시로 만들어 먹을 감과 감 말랭이용 감으로 나누고 딸과 아들 몫으로도 조금씩 담아놓았다. 갑자기 부자가 된 것 같았다.

문득 외갓집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외갓집은 내게 요지경 같았다. 놀 거리가 많았고 먹을거리가 넘쳤으며 언제나 새로움이 가득하였고 늘 활기차고 분주하였다.

이맘때였던 것 같다. 머슴들이 넓은 앞마당에 멍석을 쫙 깔고 나락을 쏟아 놓으면 삼촌과 큰 오빠들은 나락을 골고루 펴고 어린 우리들은 펴 논 나락을 양발로 밀어가면서 길게 고랑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들은 꾀를 부렸다. 하나 둘 빠져나갈 궁리를 하면 외할머니는 말랑말랑한 홍시를 들고 나와 우리를 유혹하였다. 홍시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발뿐만 아니라 갈퀴를 이용해 벼를 뒤집었고 그날 밤 우리들은 세상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외갓집 뒤 안은 보물창고였다. 이맘때가 되면 아이들에게 출입금지가 내려졌지만 우리들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 잘도 숨어들었다. 달콤하고 아삭한 대추, 새콤하고 달짝지근한 석류, 말랑한 홍시의 치명적인 단맛은 우리를 악동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어디 그뿐이랴. 운이 좋으면 귀하디귀한 호두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겉 과육을 발라내고 딱딱한 알갱이를 돌로 깨면 나타나는 속살. 그 고소함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우리들의 전횡은 가을걷이가 끝나도 계속되었다. 감나무에 남겨둔 까치밥이 우리의 목표물이었다. 감나무를 흔들거나 대나무 장대로 툭툭 치면 땅으로 떨어지는 까치밥. 흙이 잔뜩 묻어도 상관이 없었다. 흙을 골라내고 먹으면 그 맛이 어찌나 달고 좋던지……, 어른들의 걱정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외갓집 방문은 뜸해졌지만 겨울방학이면 으레 우리들은 외갓집으로 모여들었다. 외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광에서 살짝 언 홍시를 꺼내어 우리 앞에 내어 놓았다.

"너희들 오면 주려고 내가 좋은 것만 골라서 아껴 두었다. 어서들 먹어라"

차가운 홍시는 더 달고 맛이 좋았다. 언제부터인가 홍시는 나에게 외갓집이고 외할머니로 인식되어졌다. 결혼을 하고 외갓집은 서서히 멀어졌다. 외할머니도 하늘나라로 떠났고 외갓집의 감나무도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나에게 홍시는 여전히 외갓집이고 외갓집은 내 마음속의 고향,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으로 여전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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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