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9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충주 호암지 위령탑 주인공 밝혀졌다

1937년 5월 수리공사 중 익사한 일본인 잠수부
김희찬씨, 1937년 신문검색 통해 찾아내

  • 웹출고시간2016.07.11 14:09:45
  • 최종수정2016.07.11 19:49:31
[충북일보=충주] 충주시민들이 즐겨 찾는 유원지인 충주호암지 서북쪽 제방위 비석터에 세워져 있는 위령탑의 주인공이 밝혀졌다.

호암지 서북쪽 제방위 산책로 옆(문화동 3887-1) 일대에는 과거 호암지 수리조합장 등의 공덕비 2기가 세워져 있고 그 뒤쪽 8~9m가량 떨어진 곳에 강돌 콘크리트 기단 위에 가옥형 석함과 '慰靈塔(위령탑)'이라고 암각된 비석1기가 있다.

위령탑은 높이 1m의 강돌 기단 위에 높이 95㎝, 폭 45㎝, 두께 26㎝ 규모로 세워져 있다.

이 위령탑은 그동안 누구의 혼령을 위로하는 석물인지 알 수 없었으나 한 향토사학자의 노력으로 확인됐다.

'충주 아이들의 하늘' 김희찬 간사는 최근 1937년 5월23일 자와 25일자 매일신보에서 단서를 찾아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충주수리조합 호암제에서 통관(桶管) 파손 수리공사를 하던 인천 조일조(朝日組) 잠수부 일본인 고하만치(古賀萬治·44)씨가 5월17일 익사하자 닷새 만에 한국인 제자 김성손(27)씨가 높은 수압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시신을 건져냈다.

충주수리조합은 조합장과 충주군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위령제를 지냈고, 고하만치씨의 매부인 중서금일(中西金一)씨와 김성손씨가 트럭에 실어 인천으로 떠났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사건 개요를 당시 신문에서 찾아낸 김 간사는 "지난해 여름 공덕비를 탁본하던 중 지나가던 한 어르신이 '옛날에 호암지 둑방 공사에 '머구리'가 투입됐었는데…'라는 말을 듣고 신문을 검색하다 익사 사고 기사를 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한국농어촌공사 충주·제천·단양지사에서 위령탑 건립과 관련한 문서를 확인하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

김 간사는 "아마도 문서가 폐기된 듯 하다"며 "위령탑은 일제가 농업 수탈을 위해 축조한 호암제와 충주의 농업 변천사를 정리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충주 / 김주철기자 kimjc5611@hanmail.net
이 기사 주변 소식 더 자세히 보기
현재위치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