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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한전 충북본부 홍보실장

4월의 봄날, 눈발 날리는 강원도의 국도와 지방도를 달렸다. 포말의 파도 넘실대는 바닷가 마을, 깊은 호수를 따라 이어지는 한적한 집들, 어스름 그림자 깃들인 산골동네, 그 모든 곳을 지나칠 때마다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건 이정표였다. 낯익은 이정표도 있었고, 처음 마주친 이정표도 있었다. 그 길에서 수많은 이정표를 만나고 지나쳤다.

낯선 마을의 이정표를 마주칠 때마다 그 이정표 안에 무리지어 사는 사람들의 삶과 시간과 풍경들을 상상했다. 그들의 추억과 과거와 현재, 미래의 꿈들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이정표를 보며 다시 돌아왔다.

다시 일상이다. 여행자에서 일상인이 되었다. 한적한 곳을 거쳐 번잡한 도심으로 진입했고, 휴일을 즐긴다. 책을 읽고 커피를 연거푸 두잔 마셨고 음악을 듣는다. 심드렁해서 소파에 누웠다. 영화를 본다. '북촌방향', 홍상수 감독의 흑백영화를 고른다.

영화는 같은 술집, 같은 식당, 같은 골목이 연이어 나온다. 같은 인물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동일한 대사만 되풀이된다. 비슷비슷한 장면, 밤과 낮을 구별할 수가 없다. 아침과 저녁을 식별할 수 없다. 시간도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담담한 콘트라스트의 흑백 대칭이다. 대사 또한 추상화 같다.

"우연이란 우리가 지나온 수많은 우연들 중에서도 우리가 뭔가 이유를 두고 의미를 붙이고 싶어 하는 것을 부각시키는 것뿐이야. 그 '우연'이 일어나기전의 우리가 외면하고 지나쳐왔던 수많은 '우연'들을 만나 그 '우연'을 만들어내는 거지. 단지 우리는 그 '우연'에 이유를 붙이고 더 의미 있어 하고 싶은 거야." 대충 애매한 대사들이 또다시 반복되어 되풀이된다. 참으로 홍상수 감독다운 대사이다. 이 찌질한 영화 속 주인공들은 매번 데쟈뷰를 경험하는 시간의 덫에 갇힌듯하나 니체답다. 아니면 '차이와 반복'의 질 들뢰즈답다. 우리 모두 삶의 우연에, 실존적 공허로 몸을 떤다. 하지만 필연의 숨결을 깊게 마시는 일은 우연을 긍정할 수 있을 때에만 생기는 법이다. 무수한 반복 속에서 차이를 생산할 때 긍정의 삶이 생성된다지 않던가. "역사는 문제들의 규정을 통해, 차이들의 긍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는 들뢰즈의 한마디가 의미를 더한다.

커피를 블랙으로 한잔 더 마셨다. 책상에 앉아 지난주의 동해안 여행길을 떠올렸다. 길 위에 있을 때 두리번거리며 찾던 이정표들을 생각했다. 동해안 낯선 포구의 선창에서 보았던 가게들의 이름도 하나씩 되뇐다. 건어물이며 수산물이며 젓갈을 파는 상점들, 비릿한 싱싱함이 훅하고 덮쳐오는 것만 같다. 이 날 것 그대로의 생의 비린내, 생이 뛰고 있음을 알려주는 냄새. 해질 무렵 보았던 빨간 등대와 더러운 그물로 어지럽던 선착장도 눈앞을 스쳐간다.

길을 나설 때만 이정표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극한상황이 아니더라도 많은 현대인은 무기력하다. 시간의 덫에 갇힌 듯 반복된 발걸음만 되풀이하는 삶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이정표를 찾아 헤맨다. 나아갈 표지를 만들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마지막 생존자들을 일컬어 '최후의 자유인'이라고 한다. 최후의 자유란 인간이 자신의 상황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유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는 체력이 좋은 자도 처세가 좋은 자도 아니었다. 저녁노을의 장엄함, 수용소 구석에 핀 작은 들풀에 감탄하고, 병든 동료에게 자신의 부족한 음식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따뜻한 자들이었다. 살아야 하는 이유와 의미를 찾은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견뎌낸다. 일상을 창조하고 생성하고 즐거워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한계상황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의 실존치료, 의미요법(意味療法)인 로고테라피(Logotheraphy)를 소개한다. 무의미로 배회하는 자들이 삶의 엄연함을 긍정하고 어제와 다른 차이를 생산하는 오늘의 이정표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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