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부터 초가을까지 무덥고 습한 힘든 여정의 시간을 보냈다. 처서, 백로가 지나고서야 그 긴 터널을 빠져나와 홀가분한 마음이 든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번 여름은 그 어느 해의 여름보다 동남아의 열기처럼 살을 파고들고 녹아내릴 것 같은 뜨거움으로, 여행과 캠핑을 하기도 쉽지 않고 해서, 휴일이면 하안거(夏安居) 하듯 집에서 책을 읽거나 산문을 쓰고 붓을 드는 일이 많았다.
무더위 덕분이라 해야 하나, 여름 내내 비교적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아직 한여름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어설프지만 그래도 가을이 왔다. 농부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조금은 알 것도 같은 이러한 계절의 순환이 논과 밭의 곡식과 과일을 익게 하여 사람을 먹여 살리고 우리들의 감정에도 많은 변화를 주어 또 다른 방식으로 모진 기후에 대비하기도 하는 것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작가들이 즐겨 쓰는 삼여(三餘)라는 말이 있다. "여가(餘暇)로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때를 말하는 것인데,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왕숙전(王肅傳)의 주(註)에 나오는 이야기다. 즉 한 해의 여가인 겨울과, 하루의 여가인 밤, 그리고 시(時)의 여가인 비 오는 때를 말한다." 살펴보면 옛 선인들의 지혜로움이 가득 담겨 있는 아주 멋진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요즘 실내에서는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틀고 쉴 수 있는, 여가를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터여서, 바깥 활동하기 쉽지 않은 여름철에도 기존의 삼여(三餘), 못지않게 책을 읽거나 공부하기에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가까운 지인들이나 작가들과 대화를 나눌 때 요즘은 삼여(三餘)가 아니고 사여(四餘)일세,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여름철은 바깥 활동도 쉽지 않으니 어지간한 볼일 아니면 집에서 책을 읽거나 붓을 들어, 물외한인(物外閒人)처럼 한가한 여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계절이라 그런지 가을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 그중 염화미소(拈華微笑)란 고사성어가 있다. "말없이 마음으로 진리를 전한다는 뜻으로 석가모니가 꽃을 들어 보이자 제자 가섭이 미소 지었다는 불교의 일화에서 나온 고사성어다." "가을의 적적한 고요함이 한마디 말보다 깊은 이해와 마음의 깨달음을 전하는 지혜를 상징하는 말일 것이다." 브라질의 소설가인 '파울로 코엘로(paulo coelho)'는 "삶은 기다림이 아니라, 기다리는 동안 피워내는 용기라 했다." 무작정 기다릴 것이 아니라 씨앗을 심고 부지런히 가꾸는 그러한 아름다운 미덕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제 서서히 구절초, 쑥부쟁이, 목화, 산국 등의 들 꽃향기 가득한 꽃들이 제 몫 다하듯 피어날 것이다. 오감을 자극하는 멋과 맛, 풍류를 즐기기에 좋고, 좋은 벗과 차 한 잔 나누기에 좋은 계절이 눈앞에 있다. 음악을 듣거나 독서를 하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다. 뜻이 맞는 벗이나 좋은 사람과 어디가 되었든 여행을 더 한다면 더욱더 풍요로운 가을의 기쁨은 배가될 것이다. 이제 여름을 빠져나와 가을을 맞이하여 몸도 좀 시원하고 모든 사람들이, 뿌린 대로 거두는 결실의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