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법률센터 농본 하승수 변호사가 초고압 송전선로 갈등이 반복되는 원인과 주민 수용성 확보를 위한 제도 개선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공동취재단
[충북일보] 초고압 송전선로 건설을 둘러싼 국민 저항이 전국으로 번지고 있다. 지난 7월 30일 해남 땅끝마을에서 시작된 '용인 반도체 산단 재검토·송전탑 반대' 전국 대행진은 완주·진안·장수·무주 등을 거쳐 지난 20일 서울 광화문에 도착했다.
밀양 송전탑 갈등 당시 주민 추천으로 전문가협의체에 참여했던 공익법률센터 농본 하승수 변호사는 현재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계획 승인 취소 소송을 대리하고 있다. 10여 년 전 밀양과 지금의 전국 송전망 갈등을 모두 지켜본 그는 현재 상황을 '역대급'이라고 표현했다.
◇ 90개 송전망 한꺼번에…갈등도 전국으로
정부가 '국가기간전력망'으로 지정한 사업은 99개다. 한전 국가기간전력망 종합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이 가운데 시공·인허가 단계로 넘어간 9개를 제외한 90개 사업은 입지선정 절차가 진행 중이거나 그 이전 단계다. 사실상 전국에서 90개의 송전선로·변전소 사업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하 변호사는 "경남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국 대부분 지역에 송전선 문제가 걸려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2012~2014년 경남 밀양에서는 765kV 송전탑 건설을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이 벌어졌다. 이후 대규모 전력망 확충이 345kV급 송전선로를 중심으로 추진되면서 갈등의 무대도 전국 곳곳으로 넓어졌다는 게 하 변호사의 설명이다.
그는 정부와 한전이 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봤다. 주민들이 제기하는 건강·재산·경관 피해 우려를 충분히 다루지 않은 채 국가 기반시설이라는 이유로 사업 필요성만 강조해서는 갈등을 풀기 어렵다는 것이다.
AI·반도체 산업 확대가 전력망 확충의 주요 배경이라는 정부 설명에도 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하 변호사는 "345kV급 송전선은 장거리 송전을 위한 것"이라며 "송전선이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는 발전소와 대규모 전력 소비지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기 생산지 가까이에 공장이 있다면 장거리 송전선의 필요성도 줄어든다"며 에너지 지산지소와 전력수요 분산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정영철 영동군수와 영동군 관계자들이 지난 3월 23일 전남 나주 한국전력 본사를 방문해 전력계통부사장 등 경영진과 면담하고 있다. 이날 영동군은 지역 내 송전선로·개폐소 건설 계획에 대한 군민의 반대 입장을 전달하고 주민 수용성 확보와 지역 피해 최소화를 위한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영동군
◇ "주민끼리 노선 떠넘기라는 구조"
하 변호사가 가장 심각하게 보는 문제는 주민이 송전망 계획을 알고 참여하는 '시점'이다.
그는 "입지선정위원회 구성 단계부터 계획을 알고 대처하는 주민도 있지만 대부분은 노선이 상당 부분 논의된 뒤에야 사업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며 "충북 괴산과 진천에서도 노선이 확정된 이후 뒤늦게 통보받은 주민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입지선정위원회 역시 구조적인 한계가 있다고 봤다. 송전선이 왜 필요한지, 반드시 필요한 노선인지, 지중화를 어느 정도 할 것인지는 주민이 논의하기 어렵고 사실상 '어디로 지나가게 할 것인가'를 정하는 단계에서 참여하기 때문이다.
하 변호사는 "주민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결국 '노선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 뿐"이라며 "결국 주민들끼리 서로 다른 지역으로 송전선을 밀어내라는 것밖에 안 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지중화에서도 지역 간 형평성 문제가 있다고 했다. 수도권 일부 지역과 달리 비수도권에서는 지중화 적용이 제한적인 만큼 노선뿐 아니라 지중화 여부와 범위까지 주민과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이런 갈등을 사업 초기부터 조정할 제도적 장치가 충분하지 않다는 데 있다.
송전망 건설에는 전기사업법과 전원개발촉진법, 국가기간전력망 확충 특별법 등이 적용된다. 주민 의견 청취와 보상·지원 등의 장치가 있지만, 하 변호사는 정작 송전망의 필요성을 결정하는 초기 계획 단계부터 주민 수용성을 실질적으로 반영할 제도는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입지선정위원회도 활동기간이 1년이고 최대 6개월 연장할 수 있지만 기한 내 결론을 내지 못하면 사업자가 노선을 결정할 수 있다.
하 변호사는 "진정한 의미의 주민 의견 수렴이라기보다 시간을 정해놓고 결국 사업자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한 구조"라며 "송전선을 몇 개나 건설할지를 정하는 장기 송·변전 설비계획 수립 단계부터 주민과 국민의 의견을 반영할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가 앞으로 수립할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과 이에 따른 장기 송·변전 설비계획부터 주민 의견을 반영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동지역 주민들이 '송전탑 반대' 손팻말을 들고 초고압 송전선로와 개폐소 건설에 반대하는 군민 궐기대회에 참여하고 있다.
ⓒ이진경기자
◇ "용인부터 재검토…전력수요 분산해야"
하 변호사의 문제 제기는 개별 송전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대규모 장거리 송전망이 왜 필요한지, 전력수요가 어디에 집중돼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을 꼽았다. 막대한 전력과 용수가 필요한 산업시설을 수도권에 집중시키고 이를 위해 비수도권에서 생산한 전력을 장거리 송전하는 구조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을 재검토하면 송전망 계획도 다시 짤 수 있다"며 "재생에너지로 전력을 공급하기 적절한 입지를 찾고 산업과 전력수요를 분산시키는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밀양 송전탑 갈등 이후 10여 년이 흘렀지만 주민들이 사업을 알게 되는 시점과 결정에 참여하는 방식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송전선이 어느 마을을 지나갈지를 주민에게 묻기 전에, 왜 필요한지부터 함께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하 변호사가 제시한 해법이다.
"전력망 계획을 세우는 첫 단계부터 주민이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송전선 하나를 건설할 때마다 같은 갈등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취재단 충북일보 이진경 기자/ 진안신문 류영우 국장/ 주간함양 임아연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