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은 참으로 무더웠다. 뉴스는 7월 한 달 33도를 넘는 폭염일수가 8.9일로 예년의 2배이며 40도를 넘는 지역도 발생했다고 전한다. 폭염 재난 문자가 빈번히 날라 오고 겁이 나기도 했다. 강렬한 열기에 숨을 턱턱 막혔다.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내고 마땅하게 더위를 피해 가며 놀거리도 별로 없어 삭막했다. 다들 이 '불덩이 터널'을 어찌 건너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예전에는 동네 느티나무 그늘이나 원두막, 다리 밑을 찾아 더위를 피하기도 했다. 냇가에 나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고기 잡는 재미에 쉬이 하루가 갔다. 집에 들어오면 시원한 우물물에 담가 놓았던 수박이나 참외를 먹는 맛이 또 기가 막혔다. 이제 그런 일은 옛날에나 있었던 먼 이야기로 남아 있다.
더운 날 놀거리가 별로 없으니 자연히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본다. 우리 집 뜰 안에 그래도 내 여름 친구가 되어준 게 있다. 장미와 배롱나무, 그리고 능소화다. 원두막에 올린 능소화는 원두막 앞과 지붕을 무성한 초록잎으로 덮어나가더니 화려하고도 기품 있는 주황색 꽃을 선물해 주었다. 능소화꽃은 무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다. 하늘을 능가한다는 '능소화'(凌霄花)란 이름 자체의 뜻 그대로다. 감히 하늘을 넘보는 꽃이라니···
두 번째 친구는 장미다. 장미는 세 그루가 있다. 그중 현관 옆에 있는 장미가 내가 가장 아끼는 친구다. 이 친구의 키는 항상 내 어깨를 넘지 않는다. 그는 놀랍게도 스스로 키와 가지를 조절한다. 매년 두 해 정도 묵은 가지는 도태시키고 새 가지를 내어 꽃을 피운다. 내가 그를 애인처럼 대하는 이유는 그가 뿜어내는 향기에 있다. 꽃 향은 아주 잘 익은 복숭아 향기가 난다. 나는 현관을 드나들 때마다 예외 없이 그와 입 맞추듯 향기를 맡는다. 그윽하고 아주 깊은, 그러면서도 지분 냄새 그득한 향기다. 말로 표현이 잘 안된다. 이 향기를 맡을 땐 더위 따위는 느낌이 없다.
세 번째 친구는 배롱나무다. 이 친구는 뜰 앞쪽에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벌써 묘목으로 모셔 온 지 오 년이 넘었다. 이제 몸통 굵기가 아이 팔뚝은 된다. 그는 여름 내내 나와 함께한 친구 중의 친구로 화사하면서도 따스한 분홍빛을 선물했다. 꽃 색깔이 진분홍 아닌 고유의 분홍색이다. 열기를 뿜어대는 한낮에 붉은 장미는 어찌 보면 좀 부담스러운 면이 있으나 분홍빛은 그렇지 않다. 그 앞에 서면 봄에 분홍빛 진달래꽃을 보듯 편안한 마음이 된다.
올여름은 좋아하는 꽃 속에 빠져 험한 열기를 건너온 것 같다. 독서에 빠지면 시간을 잊어버리듯 색깔과 향기에 물이 들어 시간과 두려움을 잊은 셈이다. 더불어 매일매일 친구처럼 대했던 꽃과 나무, 그들이 내뿜은 빛과 향으로 마음의 평안도 얻었다.
나에게 이런 엄청난 선물을 아낌없이 준 배롱나무와 장미, 그리고 능소화 같은 친구들에게 감사하다. 이 여름 나는 그 누구에게 이 같은 선물을 준 적이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