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머무는 집

2026.08.20 14:46:02

이명순

수필가·한국어강사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노부부의 삶을 들여다본다. 치매 초기 진단을 받은 할아버지는 기억을 잃어가는 두려움에 사람들과 어울리며 병의 진행을 늦추려 애쓴다. 할아버지가 다른 할머니들과 춤을 추며 어울리는 모습을 본 할머니는 외도를 의심하고 두 사람은 황혼 이혼까지 고민할 만큼 갈등을 겪는다.

이 부부에게는 오래전 교통사고로 아들, 며느리, 큰손자를 한꺼번에 잃은 깊은 상처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기억을 잃기 전에 할머니만이라도 그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이 깃든 옛집을 다시 마련하고 그대로 꾸며 놓는다. 뒤늦게 남편의 진심을 알게 된 할머니는 묵은 상처를 치유하며 화해한다.

부부가 화목하게 살아가다가 노년에 홀로 남는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에도 하나둘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떠난 사람은 말이 없지만 남겨진 사람은 함께했던 시간의 기억을 품은 채 살아가야 한다. 함께 살 때는 너무 평범해서 소중한 줄 몰랐던 순간들도 한 사람이 떠나고 나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귀한 추억이 된다.

드라마를 보며 부부가 함께 보내는 평범한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지 와닿았다. 평생의 상실을 견뎌낸 뒤 더욱 단단해진 황혼의 사랑은 깊은 울림으로 전해졌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언제나 삶의 버팀목임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무더위 때문에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만 있는 요즘이다. 하루 종일 혼자 말 한마디 없이 드라마에 빠져 있다 보니 문득 나에게도 치매라는 불청객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과의 대화가 줄어들수록 점점 고립되는 느낌도 있다. 그때 나는 무엇을 붙잡고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 두렵다.

결국 사람을 지탱해 주는 것은 살아가면서 함께 나눈 기억과 마음인지도 모른다. 기억은 혼자 간직할 때보다 누군가와 나눌 때 더 오래 남고, 관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삶의 의미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 더욱 가까운 사람들과 자주 만나며 좋은 추억을 많이 쌓고 함께 나누고 살아야겠다.

서로를 존중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노부부의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이제는 함께할 수 없는 그리운 사람을 떠올린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화려했던 순간이 아니라 평범한 날들 속에서 건네던 말 한마디와 함께 웃고 울었던 시간이다. 삶은 기억을 통해 이어지고 그 기억은 다시 살아갈 힘이 되어 준다.

어쩌면 드라마 속 그 집은 단순한 집 한 채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곳에는 부부가 함께 웃고 울었던 시간, 가족과 함께했던 행복, 그리고 먼저 떠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까지 고스란히 머물러 있었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다시 불러낼 수는 없지만 추억이 머무는 공간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준다.

누구나 마음속에 그런 집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도 그곳에서 함께했던 사람과 시간은 남아 있을 것이다. 오늘 곁에 있는 사람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미루지 말고 마음을 전하며 살아가야겠다. 함께 웃었던 날들의 추억이 오래도록 머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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