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그림을 그려 세계적인 화가가 된 김창열(1929~2021)이라는 작가가 있다.
김창열이 그린 물방울 그림 진품은 못 봤어도 그의 그림을 흉내 낸 그림들이 인테리어용으로 많이 유통되고 있어 많이들 봤을 것이다.
이중섭(1916~1956)의 은박지화가 그림 재료 살 돈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탄생했듯이 물방울 그림도 김창열이 어렵게 프랑스에서 생활할 때 우연한 기회에 나왔다.
"파리에서 가난하게 생활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린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 유화 물감을 떼어내고 캔버스를 재활용하기 위해 그림 위에 물을 뿌려 놓았는데, 아침에 보니 물이 방울져 햇살에 보석처럼 영롱한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존재의 충일감에 온몸을 떨며 물방울을 만났습니다.(중략)내가 외국에서 오래 생활을 하다 보니, 과연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결국 서양과 다른 나의 차이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바로 한 방울의 물방울이었던 것입니다. 물방울은 불교의 공(空)과 도교의 무(無)와도 통하는 것입니다."라고 김창열은 물방울 그림 탄생 비화를 생전에 말했다.
김창열은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태어났다. 서예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와 함께 자라며 서예를 통해 미술과 접했다. 광성고보 시절에 김구 선생을 따르는 모임에 한 번 나갔다가 연락책을 하라는 말을 듣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직 아무 지시도 내려온 적이 없는데, 그 일로 갑자기 수배를 받게 된다. 16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급하게 남으로 내려온다. 미리 월남한 아버지를 서울에서 6개월 만에 만났고, 2년 뒤 북에 남았던 가족들도 월남을 감행해 기적처럼 모두 상봉해 같이 살게 되는 드라마틱한 삶을 이어간다.
미술에 재능이 많았던 김창열은 이쾌대(1913∼1965)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운다. 그림에 자신감이 생기자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2학년 때 발발한 6·25 전쟁으로 학교는 문을 닫았고, 그 와중에 가족들과 헤어져 길거리에서 헤매다 얼떨결에 의용군에 끌려갔다. 다행히 후방 부대에 배치됐는데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이용해 탈출해 집에 몸을 숨긴다. 김창열은 이후 강제징용을 피하기 위해 경찰 간부 후보생을 지원한다. 휴전 후 서울대학교에 복학하려고 했으나 북으로 넘어간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 다녔다는 것이 문제가 돼 등록이 거부된다. 그러나 화가의 꿈을 접지 않고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붓을 잡는다.
김창열은 일본에서 들어오는 화집과 미술 서적을 통해 당시 세계적 흐름을 읽어냈고, 창작에 전념했다. 박서보가 소개해준 홍익대 미술과 출신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면서 경찰관 생활을 그만두고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한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이혼에 따른 괴로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김창열은 미국에 가 있던 김환기(1913∼1974)의 도움으로 넥타이 공장에서 일을 하는 등 갖은 궂은일을 하며 4년을 버틴다. 1969년 백남준(1932∼2006)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뉴욕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김창열은 파리 근교에 있는 마굿간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그림만 그리다 우연한 기회에 물방울그림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72년 작업실 근처 골동품 가구점에서 연 첫 개인전이 우연히 길을 지나던 파리의 일간지 기자 눈에 들어 기사화되고, 이후 다른 신문사들도 물방울 그림이 특이했는지 앞다투어 취재를 해가게 된다. 이후 물방울을 소재로 한 그림들은 전 세계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전시 요청을 받는다.
2016년에는 한때 제주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했던 것이 인연이 돼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을 건립된다. 생존작가로는 드물게 작가 이름을 딴 미술관의 주인공인 김창열에게 개관 소감을 물으니 "목탁 두들기고 다니는 스님이 암자 하나 지어 받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탁발하고 다니던 스님이 멈춰서 쉴만한 공간을 얻은 셈이죠."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김창열은 성북동 작업실이 함께 있는 대저택에서 자식들과 행복하게 말년을 보내다 2021년 91세의 나이로 하늘의 별이 됐다. 그의 유해는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마당에 있는 나무밑에 영원한 안식을 취한다.
백발과 흰 수염, 선한 눈매가 어울려 도인을 연상시키는 김창열 화백은 생전에 "나는 말하는 공부를 못했어요. 그래서 내 그림을 멋있게 설명하지 못해요. 언젠가 백남준 씨가 '그림은 장난'이라고 했는데 내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이 어디서 누가 해라 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생각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행위이니까요."라고 말하며 자유로운 작품세계를 피력했다.
김창열은 물방울 그림을 그리게 된 40대 중반부터는 부(富)와 명성을 얻었지만, 그전에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길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이런 축적된 내공들이 물방울로 맺힌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