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소리를 듣다

2026.08.10 15:56:02

박명애

수필가

메타세콰이어가 그늘을 드리운 산책길을 걷는다. 내가 속수무책 건성으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수목원은 성숙하고 아름답게 성장해 있었다. 매년 가슴 설레며 꽃 보길 기다리던 자엽 안개 나무도 어느새 몸통이 두리두리 해졌다. 달콤한 솜사탕 같던 꽃은 지고 작은 씨앗을 맺고 있다. 불볕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구나 나무를 쓰다듬으며 뭉클해진다.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축축한 숲에서는 진한 풀 내음이 풍겨온다. 태풍은 비껴가면서도 먼 이곳까지 흔적을 남겼다. 메타세콰이어 잎들과 찢어진 초록 잎들이 꽃잎처럼 흩뿌려져 있다. 큰 나무들이 나란히 어깨를 맞잡고 그 그늘 아래 작은 나무들이 서로 부등켜 안은 채 큰 바람을 견뎠으리라. 그렇게 지난 밤 새를 품고 나비를 품고 벌레들을 품었으리라. 한바탕 놀다간 폭풍우 뒤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는 태양 아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수액을 끌어 올려 줄기를 부풀리고 잎을 피우는 나무들의 들숨과 날숨이 청량하다.


우리의 삶도 그리 땡볕과 장마가 엇갈리며 들락날락 숨을 턱턱 막히게 하지만 그 사이 사이 오늘 같은 청량한 바람 한줄기, 부드러운 햇살이 선물처럼 오기에 살아내는 것이리.


곁에서 걷는 동생의 얼굴이 한결 밝아진다.


메타세콰이어 길을 지나다 무지개를 그리며 솟아오르는 분수와 마주한다. 만폭동의 우렛소리라면 과장이겠지만 시원한 물소리에 가까이 다가가니 눈 날리듯 안개비가 얼굴에 내려앉는다. 살짝 비릿한 물 내음에 한낮의 열기와 싱그러운 풀 냄새가 함께 묻어있다. 잠시 물가 나무 벤치에 앉아 물 바라기를 한다. 규칙적으로 솟아오르는 물기둥과 연못 위에 그려지는 파문을 보며 동생은 요즘 연습 중인 곡의 리듬을 흥얼거린다. 악보 위에 뛰노는 음표들을 보면 우리들이 걸어온 길이 떠오른다고. 눈으로 소리를 읽고 악기로 그려내는 과정이, 으레 그러려니 생각했던 그 과정이 삶의 철학 같다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지난 어느 날의 연주회를 생각했다. 젊은 연주가의 손끝에서 구슬이 굴러가듯 맑고 우아하게 흘러나오던 베토벤 소나타 31번의 선율. 모두 기억할 수 없지만 진행자의 해설 때문일까. 오래간만에 듣던 그 곡에 코끝이 찡했었다. 그 곡은 베토벤이 오십일 세에 작곡한 곡으로 32곡의 소나타 중 거의 마지막 작품에 속한다. 청력을 잃고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 암울한 운명과 맞대면한 상황에서 몽상처럼 피어오르던 리듬이 31번 소나타다. 그 뜨거운 생애가 피아노 위에서 진지하면서도 새털처럼 가볍고 명랑하게, 묵직한 저음부로 깊게 내려가면서도 탁하지 않게, 격렬하게 포옹하면서도 상냥하게. 해맑은 소릿결이 매끄럽게 풀려나오던 그 시간. 내가 건반 위에서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뛰어노는 손가락의 리듬에 취해 있는 동안 연주자의 등과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가고 있었다. 젖은 등에 대고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며 눈물이 핑 돌았던가. 우리는 모두 그렇게 뜨겁게 살다 가는 인생들이려니. 크게 숨을 들이마셔 본다. 나무들처럼 어깨에 팔을 두르고 내려오는 길, 마타리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가을이 멀지 않았나 보다. 동생이 무슨 꽃이냐고 묻는다. <소나기>의 어린 소녀처럼. 그 소리가 참 좋다. 맑은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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