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음성교육장·수필가
이 고개의 유래와 어원은 크게 민간 전설과 언어학적 분석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민간 유래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대중적인 유래는 '옛날 이 고갯길 주변에 배나무가 많았다'는 데서 시작이 된다. '배나무 배(梨)' 자에 고개를 뜻하는 충청도 방언인 '티(치-峙)'가 붙어 '배티'가 되었다는 설로서 예전에 이 고개 주변에 형성된 마을 역시 이 고개를 경계로 어느 성씨가 모여 살았느냐에 따라 고개 동쪽인 모충동 쪽은 곡산 연씨가 많이 살아 '연배티', 고개 서쪽인 개신동 쪽은 밀양 박씨가 많이 살아 '박배티'라 불러왔던 것이다.
하지만 언어학적으로 어원을 분석해 보면 이 지명의 본래의 의미를 찾아볼 수가 있다. 고대 우리말에서 '배'나 '백'은 '크다, 높다, 밝다'라는 뜻을 가진 지명 요소였으며 '티'는 한자 '치(峙)'가 구개음화되기 전의 형태로서 순우리말 '재'와 함께 고개를 뜻하는 말로 쓰이던 옛 단어이다.
따라서 '배티'의 본래의 의미는 배나무와는 상관없이 '크고 높은 고개'라는 뜻의 순우리말 지명이며 실제로 청주읍성에서 남서쪽으로 나아갈 때 마주하는 첫 번째 큰 고개였기 때문에, 옛날 기준으로는 꽤 높고 험한 고개라는 의미에서 '배티'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는 '배티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오늘날 이 배티고개를 '모충고개'로 부르게 된 데에는 가슴 아픈 근현대사가 얽혀 있다. 모충동(慕忠洞)이라는 동네 이름의 직접적인 기원이 된 모충사(慕忠祠)는 구한말 역사의 소용돌이와 깊은 연관이 있는 사당이다.
1894년(고종 31년)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삼남 지방을 휩쓸고 북상할 때, 청주 지역 또한 치열한 격전지 중 하나였다. 당시 청주읍성을 지키던 충청병영의 관군과 일본군은 대전 부근에 집결한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다. 영관(營官) 염도희, 교장 박춘빈, 대관 이종구 등이 이끄는 청주병영 소속 관군 70여 명이 현재의 강외면(현 오송읍) 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의 기습을 받아 전원 전사하였다. 그해 11월, 청주목사 임택호(任澤鎬)가 남석교(南石橋) 밖에 제단을 설치하고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진 이들 70여 장졸들의 넋을 위로하는 치제(致祭, 임금이 제물을 내려 제사 지냄)를 지냈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 대전 방면 진위대 대대장이었던 안종환(安宗煥)이 고종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전몰한 장교들에게 관직을 높여주고, 기존의 제단에 국가가 공식적인 이름을 내려줄 것을 청했는데 고종 황제가 이를 받아들여 '모충(慕忠)'이라는 이름을 하사(사액)하였고, 당산(현재의 청주 시청 인근 탑동/영운동 인근 산줄기)에 제대로 된 단을 쌓고 기념비를 세우는 등 공식적인 사당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일제강점기가 되자 일제는 '모충(慕忠)'의 의미를 천황에 대한 충성과 연관시키기 위하여 1914년 8월 당산에 사당 건물 형태의 모충사(慕忠祠)를 건립하였는데 1923년에 이곳에 신사를 건립하기 위해 '모충단'과 사당을 화청령 동쪽 기슭(현 모충동 청송아파트 부근 추정)으로 쫓아내듯 이전하였다. 해방 후인 1947년에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을 폐지하면서 고개 기슭에 자리 잡은 사당인 '모충사'의 이름을 따서 이 지역의 행정 지명을 '모충동', 고개 이름을 '모충고개'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도시개발로 1975년에 현위치(모충동 산13-6)로 또다시 이전하게 되는 등 향토문화적 가치가 높으므로 청주시 향토유적 제7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지만 오늘날 동학농민운동이 '반란'이 아닌 국가적 격변기 속의 정당한 '민중 혁명'으로 올바르게 재평가되면서, 동학군을 진압하다 죽은 관군을 기리는 사당에서 동네 이름(모충동)이 유래한 것에 대해 지역 사회 내에서 논란과 개정 목소리가 나오기도 하는 등, 모충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이면을 고스란히 간직한 상징적인 장소인 것이다.